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2012년 개봉한 「건축학 개론」은 단연 ‘첫사랑’ 영화다. 모두가 경험했을 듯한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감히 「n번방」 이야기와 연결시키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첫사랑 서연과 손만 잡아도 가슴이 커지도록 설레였던 승민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n번방 조주빈을 비롯한 그 멤버들과 연결시키기 어렵다. 그런데 연결이 된다. 그게 한국사회의 모습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 남자들의 모습이다. “모든 남성을 싸잡아서 매도한다.”고, “너는 남자 아니냐?”고 말하실 수 있다. 충분히 그럴만 하다. 한국사회 남성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사회화된 과정이 있고 그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그런 모습을 좀 더 성찰적으로 마주 대해보자. 심리적으로 힘들어도 말이다.

다시 「건축학 개론」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 어디에서 한국사회, 한국남성의 일반적 모습을 볼 수 있는가? 남성적 시각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모습이다. 특히 혼자 사는 젊은 여성일수록 더 그렇다. 이 여성을 ‘취하게’ 한다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잘 취하고 자취하는 여자」를 이상형으로 바라는 남성들의 소망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줄거리와 함께 이 영화는 당시 400만명 이상이 넘는 관객에게 첫사랑 영화로 등극하였다.

영화의 처음과 끝은 단연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 이야기다. 그런데 손만 잡아도 설레는 승민에게 친구 납뜩이는 ‘진심으로’ 승민이 서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조언을 해준다. 납뜩이가 준 무스를 마지못해 받는 척 했던 승민이 서연과의 데이트 전에 정성껏 무스를 자기 머리에 바르는 모습은 납뜩이와 승민의 대화가 단순한 농담 주고받기가 아님을 암시한다. 

「일단은 소주 한병을 사. 그리고 걔네 집 앞에 가는 거야. 술 취한 목소리로 집앞이라고 전화하고 끊어! 그러면 사람이 굉장히 궁금하게 돼있어.」 (서연이) 나오면, 「그때 딱 다가가. 그러면 그때 걔가 무서우니까 그땐 슬슬 물러서다가 뒤 벽에 부딪히게 되어 있어. 그때 그 순간 오른손으로 벽을 딱 짚어. 그럼 걔가 완전히 쫄아가지고 왜 왜 그래. 그때 기습적으로...(키스 암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돌아가. 터프하게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뒷모습이 컨셉이야! 왠지 쓸쓸해 보이는 그런...」

또 이런 이야기를 납뜩이는 한다. 「... 이 한마디만 해. 널 갖고 싶었다. 그래 나랑 같이 살자. (승민이 “집도 없는데”라고 대답하자)... 병신 누가 진짜 같이 살래? 말을 그렇게 하라는 거 아냐, 말을.」 이렇게 말하는 납뜩이를 승민은 껴안으면서 「고맙다, 납뜩아! 너밖에 없다.」고 진심으로 감사해 한다.

승민과 서연 사이를 갈라놓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재욱이 등장하는 장면은 더 인상적이다. 「야 별거 없어. 여자는 일단 술먹여서 취하게 만들어. 취하면 업어. 침대에 눕혀. 끝!」 이렇게 이야기했던 재욱은 서연을 술 취하게 한 후, 서연이 혼자 사는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들어간다. 집밖에서 서연을 기다리다 재욱이 서연을 데리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순간 승민의 첫사랑은 끝이 났다. 

남자가 술냄새를 풍기면서 위협적으로 내게 다가와 벽에 몰아치면서 다짜고짜 키스를 하면 상대 여성은 무엇을 느낄까? 한국사회에서 자라온, 그리고 자라고 있는 남성들은 그걸 ‘내 여자를 얻을 수 있는 남자다움’으로 내면화시켰다. 그래서 여자는 먼저 섹스를 한 ‘놈’이 가질 수 있는 ‘전리품’이었다. 납뜩이의 이야기를 실천할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우물쭈물만 하면서 평생 가는 ‘내 여자’를 얻으려 했던 승민은 재욱이 먼저 섹스로써 서연을 차지하자 그냥 물러섰다. 왜 그랬을까?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욱은 승민의 학교 선배이다. ‘형’이다. 남자들 사이에 ‘형’이 호칭이 되는 순간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는 사라진다. 끈끈한 의리가 우선이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필자는 친족관계를 제외하고 ‘오빠’ 명칭이 사라지길 바란다). 재욱은 형일 뿐 아니라 강남 사는 있는 놈이다. 승민은 (돈) 없는 놈이다. 승민은 버스를 타지만 재욱은 자기 차가 있다. 서열과 돈에서 밀리고 내 여자를 뺏긴 승민이 고작 할 수 있었던 행동은,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강남 아파트로 이사 가자는 억지일 뿐이다. 

다시 만나기 싫다고 말하는 승민에게 서연이 왜냐고 물었을 때 승민은 ‘그냥’이라고 답했다. 이 ‘그냥’에 우리 (남성) 모두가 마주하기 불편한 진실이 있다. 여자는 남자가 차지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여자를 차지하는 과정에서도 남성적 위계 서열이 작동한다. 혼삶 여자는 특히 남자가 차지하기 쉬운 존재이다. 그나마 ‘그냥’이라고 퉁치고 넘어갔던 2012년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기반 폭력이 없었다. 그런데 ‘용기있는’ 남자가 ‘남자다운’ 방식으로 여자를 차지한다는 의식이나 가치, 규범이 그리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남자들이 손에 스마트폰을 쥐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스마트폰에 저장한 자신의 전리품을 자랑할 수 있는 세계가 펼쳐졌다. 변하지 않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쥐면서 괴물이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이제 건축학 개론에서 찾을 수 있는 잠재적 n번방의 모습을 살펴보자. 여자는 벽에 밀어부쳐야 얻을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 납뜩이는 n번방 유료회원 정도가 됐을 것 같다. 적극적인 유포는 하지 않더라도, 올라오는 동영상을 숨죽이면서 즐기는 수준 정도는 될 듯하다. 그리고 친한 친구에게는 슬쩍슬쩍 보여주면서 자기 자랑도 하고 연애의 테크닉을 가르친답시고 으스댈 인물이다. 재욱은 돈도 내고 적극적인 요구도 하고, 필요하다면 여성 대상 성착취에도 나설 듯하다. 승민은? 아마 호기심(!)으로 한두번 쯤 방을 들락거릴 것 같다. 그렇지만 남자들이 뭐 그러려니 하면서 혹은 조주빈 같은 자들의 위세에 눌려 그냥 침묵하며 살 인물이다. 그러면서 현실세계에서 평생 갈 내 배우자를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연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마시는 술 자체에 대한 죄책감이나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혼자 살기 때문에 ‘불안’이라는 짐 하나를 더 안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무서운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어디를 가든지 나를 찍을지도 모르는 카메라들이다. 그리고 사실상 영원히 떠돌아다닐 영상들이다. 보통 남자들을 괴물로 만들 수 있는 스마트폰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2012년 당시 건축학 개론 시나리오 그대로 영화를 만들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서연에게는 첫사랑의 추억보다 디지털을 이용한 성착취ㆍ성폭력의 불안과 공포만이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혼삶 남성은 외로움을 걱정하지만, 혼삶 여성을 쫓아다니는 단어는 안전이다. 혼삶에도 젠더가 있다. 건축학 개론이 전해주는 첫사랑 뒤에서 찾아낸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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