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옥 나눔과나눔 사무국장
박진옥 나눔과나눔 사무국장

사람들은 말한다. 죽으면 끝이라고. 그런데, 정말 끝일까? 물론 죽은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이미 심장이 멈추고 의식이 없는 상태이니 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는 순간부터 이 별과의 이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선 죽은 몸뚱이를 그냥 둘 수는 없다. 그냥 두었다가는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게 된다. 살아 있을 때는 몰라도 마지막은 깨끗하게 가야지. 그렇게 하려면 분명 누군가는 죽은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해야 한다. 그런데 누가 이 몸뚱이를 인수해주지? 걱정이다. 혹시 몰라 유언으로 가장 믿음직한 사람에게 부탁하면 어떨까? 이 정도면 안심할 수 있을까?

◇“왜 안 되죠? 내가 연고자인데” 무연사회를 조장하는 연고자의 범위

2018년 5월 말 중랑구 한 병원에서 패혈증으로 돌아가신 무연고 사망자 최○○ 님의 장례가 있었다. 장례식에는 고인의 나이든 이모와 함께 고인을 가까이서 돌보던 이웃 두 분도 함께 참여했다. 고인은 이모 집 부근에 살았다. 그래서 이모가 자주 들러 고인을 챙겼다고 한다. 마지막 병원치료 때도 이모가 곁에 있었다. 하지만 고인이 돌아가신 후 장례만은 이모가 할 수 없었다. 이유는 오랫동안 고인과 연락도 하지 않고 멀리 다른 지역에서 살고 계신 어머니가 고인의 시신을 구청에 위임해서 무연고 사망자가 됐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해 6월 중순 서대문에서 사시다가 심장성 쇼크로 돌아가신 이○○ 님의 장례에도 동생이 참여했다. 동생은 갑자기 쓰러지신 형님 곁에서 임종을 지켰다. 너무나 황망했다. 하지만 동생에게 장례는 허락되지 않았다. 자녀들이 오랜 단절과 경제적 이유로 시신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조카들을 설득해서 형님의 장례를 치르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정보를 이유로 결국 조카들의 전화번호는 알 수 없었고, 형님의 장례는 나눔과나눔이 진행하는 무연고 사망자 장례식에 와서야 치를 수 있었다.

최○○ 님과 이○○ 님 모두 연고자가 있었고, 고인의 장례를 치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장사 등에 관한 법률’ 때문이다. 이 법 제2조의 제16호를 보면 연고자의 정의가 규정되어 있다.

정리하면, 시신 인수의 최우선권은 아내 또는 남편이고 자녀가 2순위, 부모가 그다음이다. 그리고는 손녀․손자 등 자녀 외의 직계비속과 할머니․할아버지 등 부모 외의 직계존속이 각각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형제․자매는 여섯 번째이다. 이 순서에 따라 연고자는 권리․의무를 행사한다. 그래서 이○○ 님의 자녀가, 최○○ 님의 부모가 시신 인수를 하지 않았을 때 이모가 그리고 동생이 장례를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만들고 있는 법. 오늘날 사회 문제가 되는 무연고 사망자를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이 오히려 양산하고 무연사회를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연고자가 있고 장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법이라면 공론의 장에서 함께 이야기 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법 개정이 시간도 필요하고 절차도 복잡하다면 최소한 입법 취지에 부합하게, 그리고 현장에서 더는 이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연고자의 범위 적용에 재량권을 부여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유언이 있다고요” 유언을 해도 인정되지 않는 사후 자기결정권

나눔과나눔 사무실에 할머니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문의할 게 있다며 말문을 여셨다. 친구들과 서로 장례를 해주기로 약속하고 유언장도 작성했는데, 가족이 아닌 친구들이 장례를 해줄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순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멈칫했다. 마음 편하게 여생을 보내시라고 친구도 가능하다고 말씀드려야 할지? 아니면 사실대로 현재 법률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려야 할지? 잠시 생각한 후에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래도 이렇게 전화를 끊으면 안 될 것 같아 나눔과나눔이 이런 장례가 가능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한다는 당부도 드렸다. 그래도 위로는 안 된 것 같다. 전화를 끊는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리고 2018년 2월 초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파혼 하고 안타까운 선택을 한 무연고 여성의 장례를 지원했다. 그 여성은 안타까운 선택을 하면서 유언장을 작성했다. 유언장은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을 보호자로 지정할 테니 화장해서 뿌려 달려는 내용이었다. 이 유언장을 본 연인은 마지막 유언을 지켜주기 위해 변호사도 만나고 백방으로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유언장이 있다고 해도 혈연의 가족이 아니면 장례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유언장을 작성하고 공증까지 받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죽음과 장례는 해당하지 않는다. 

즉, 시신의 인계 및 장례에 관하여는 유언에 정해진 바가 없다. 그래서 장례를 누구에게 어떻게 해달라는 내용은 원칙적으로 유언을 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만약 유언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생전 사망자의 뜻이 이러했다는 정도의 의미만 갖게 되고, 본인의 의사에 따라 장례를 진행할 수는 없다.

이러한 법․제도는 본인이 죽은 이후 본인의 장례 및 삶의 마무리와 관련 돼 본인의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후 자기결정권’의 침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사후 자기결정권’이라는 용어 자체부터 생소하고 논쟁거리일 수 있다. 그리고 ‘사후 자기결정권’을 어느 범위까지 인정할 수 있느냐 등에 이에 대한 사회적으로 논의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2015년 이후 1인 가구가 한국의 주된 유형의 가구가 되었다. 그래서 더는 혈연의 가족에게 죽음을 부탁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렇게 시대가 변하고 있다면 법․제도도 함께 시대를 반영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한국의 법은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죽는 순간부터 이 별과의 이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시신을 인수해 삶의 마지막을 동행할 사람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혈연의 가족이 그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점점 가족에게만 의지할 수 없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또한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죽음 이후, 삶의 마지막 과정을 내가 생전에 결정하고 편안하게 죽을 수 있다면 눈을 감는 게 조금은 더 편하지 않을까. ‘사후 자기결정권’ 이제부터 함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저작권자 © 1코노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