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죽여주는 여자」는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1인 가구 사람들의 영화다. 그래서 개봉 당시 10만여 명 정도만 찾았다. 물론 감독께서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존재 자체가 「미안한 사람들」만 골라서 배역을 구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악 구도가 있으며 악이 벌을 받기도 하고 관객이 선망할 수 있는 주인공의 존재도 뚜렷한 패턴을 감독은 일부러 선택하지 않은 듯 하다. 불편함을 자극함으로써 내 인생이 될 수도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성찰하는 기회를 감독은 영화를 통해 제공하고 싶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한국에서도 필리핀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코피노(Korean + Filipino: 한국남성들이 필리핀에 살면서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낳은 후 부양책임을 외면한 채 한국에 와서 연락을 끊은 아이들) 민호, 일찌기 한쪽 다리를 잃고 장애인이 되어 골방에서 성인용 피규어를 만들며 어렵게 생계를 연명하는 도훈, 한국사회 어디를 가도 외면받는 트랜스젠더 집주인 티나,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노인들(세비로 송, 종수, 재우)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중심에 평생 성매매로 살아온 박카스 할머니, 죽여주는 ‘여자’ 소영이 있다. 젊었을 때에는 미군을 상대로, 나이가 들어서는 남성노인 상대 성매매를 하면서 살아간다.

남성이자 장애인이며 돈 없는 청년, 트랜스젠더 여성, 버림받은 ‘혼혈 남자아이’, 죽음을 선택하는 노인, 성매매 여성,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한국사회는 아직 입장 정리를 못했다. 머리에서는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겠지만, 가슴에서 나오는 편견과 어색함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외면하고 모른 척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에서도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우리’ 중 누군가가 없다.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주인공이 없는 셈이다. 영화가 끝나는 와중에 어떤 변화도 없이 그들의 삶은 이어진다. 민호가 친부 확인을 받아 한국인이 될 가능성이 높아질 암시만이 있다. 그들의 중심에 있던 소영은 「양로원 갈 돈도 없어서」 담담하게 받아들인 교도소 생활 중 조용히 죽는다. 그리고 무연고자로 납골당에 안치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진짜 이름 양미숙을 찾게 된다.

영화의 주 흐름은 소영을 중심으로 한 노인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노인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되지 않는다. 어리고 젊은 시절이 있기 때문에 노인 소리를 듣게 된다. 영화에서 주로 다루는 노인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어린아이 민호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민호는 필리핀에서도 한국에서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존재이다. 편견과 배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인생이다. 어린아이의 이야기는 청년으로 옮겨간다. 도훈은 남성이면서 다리 한쪽을 잃은 장애인이다. 그리고 가난하다. 사회는 도훈에게 ‘정상적 연애’를 허용하지 않는다. 돈 없는 장애 청년남성의 삶은 트랜스젠더 티나와 연결된다. 여자이지만 여자대학 입학도 아직까지는 불가능한, 사회 어디를 가도 받아줄 곳을 못찾는 트랜스젠더이다. 티나의 생계 터전은 서울 이태원이다.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문화적ㆍ인종적 다양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넓은 곳이다. 

민호, 도훈, 티나의 이야기가 세월 따라 흐르게 되면 서울 시내 공원에서 박카스 할머니를 찾는 남자노인들, 죽여주게 짜릿한 박카스 할머니 소영, 고통과 회한, 고독 속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남자노인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에서 남성적 정체성은 경제력 있는 가장의 모습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는 노후에 들어서면 남성적 정체성은 허물어지고 심지어 자발적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 2005년 이후 성매매가 불법이고 처벌받는 행위이지만, 남자라면 성매매 그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살다가 늙고 병이 든다. 게다가 가족관계마저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나, 이제 그것도 못해(재우).」하는 상황이 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인생이 돼버린다.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남성성에 얽매여 살아온 결과를 여성(소영)이 ‘죽여주게’ 해결해주는 상황은 양가치적이다. 성매매로써 소영에게 들이댔던 남성들이 자신들의 죽음조차 소영에게 들이대고 그 결과 소영이 무고한 벌을 받는 과정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성에 대한 남성적 지배관계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는 모양새이다. 반면 여성 위에 군림했던 남성들이 늙어가면서 가진 것들을 하나하나 잃고 결국 여성의 손(소영)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는 역전된 상황으로 볼 수도 있다. 가부장제의 부메랑을 맞은 남성들이 받을 수 있었던 마지막 도움은 여성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화 속 노인들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든 변함없는 사실이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은 가장 높은 수준의 자살률을 보이는 국가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자살은 남성(노인)적 죽음의 한 형태이다.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남성들이 특권을 누리는 만큼 특히 늙어서 갖는 관계의 단절이 낳는 대가이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부메랑이다. 50대가 넘어서면 여성과 남성 간 자살자 수 격차가 세 배로 벌어진다. 60대가 넘으면 네 배가 되고, 80대가 되면 다섯 배 가까이 된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연령대 별로 다양하면서도 한국사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1인가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1인가구 삶의 끝이 자발적 죽음이라는 불편한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대리만족도 없고 선뜻 내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불편한’ 영화를 사람들이 많이 찾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찰해야 할 지점이 있다. 천만 관객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영화를 최소한 백만 관객은 찾아보는 분위기가 되어야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많은 (남성)노인들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지 않을까? 

여자가 죽일 수밖에 없었던 (남성)노인의 모습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강하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면서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규범이 죽음이라는 부메랑으로 다가오고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1등 그만 하려면 가부장제의 유산으로서 남성ㆍ여성 관련 규범의 변화가 필요하다. 「가부장제를 죽여주는 사람」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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