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코로나19만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지금까지 기생충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의 탄탄한 실력에 제작비 150억 원에 더하여 막대한 홍보비용까지 투입해서 미국 본토를 점령한 영화 ‘기생충’ 이야기다. 그 기생충과 달리 제작비 3억원에 탄생한 ‘성실한 나라의 엘리스(이하 ’엘리스‘)’가 있다. 두 영화 모두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한국사회를 묘사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런데 기생충은 사이다 영화이고 엘리스는 불편한 영화이다. 기생충은 한국사람들에게 익숙한 4인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엘리스는 사실한 혼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기생충은 상당수 사람들에게 쾌감을 안겨줬다. 어리숙한 부자 가족을 똘똘 뭉친 돈 없는 ‘가족’이 그야말로 ‘뺏겨먹는’ 과정이 재미와 스릴, 허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나온다. 감독은 선악 구도를 선명하게 그리려 하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계층격차 같은 사회문제를 지적하려고 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이 땅의 많은 대중들은 ‘반지하’에 사는 가족의 입장에 서서 계층 간 격차 현실을 들춰냈다. 그리고 차별의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를 만들면서 ‘있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을 돌렸다. ‘약자로서 나’에 대한 문제제기 보다는 강자로서 그들에게 모든 문제의 책임을 돌리는 사이다 마시는 듯한 영화의 시원함을 즐겼다. 

그런데 ‘엘리스’는 소수 상층이 아닌 평범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손가락의 방향이 저 위가 아니라 나에게 향하고 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 불편하다. 안국진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제작 의도대로, ‘용산참사가 계기가 되어 보게 된 약자 간 싸움’이 영화의 주 흐름이다. 죽이든 놀리든 이용해먹든 뒷담화를 까든 뭔가 영화에서나마 잠시 쥐고 흔들 수 있는 ‘그들’이 없다. ‘그들’이 사는 듯한 아파트 모습만 잠깐 나올 뿐이다. 게다가 익숙한 가족의 모습도 없다. 결혼한 수남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남편은 산업재해로 인해 장애인이 된 후 수남의 삶에서 사실상 사라진 사람이다. 동네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구도를 형성하는 상담사 경숙, 군 원사 출신 도철의 주변에서도 가족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이미 사라졌는데, 상업고교 진학을 ‘엘리트 코스’로의 진입으로 알고 14개나 되는 자격증을 딴 수남의 삶이 있다. 수남의 많은 자격증은 ‘컴퓨터’ 하나의 등장으로 단번에 무용지물이 되지만 수남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노력보다도 ‘외모, 큰 가슴’이라고 말하는 괴물교사가 있었지만, 그래도 수남은 노력한다. 치열하게 스펙을 모으면서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는 이 시대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모은 스펙(수남의 14개 자격증)이 ‘아빠 찬스, 엄마 찬스(컴퓨터)’에 무용지물이 되는 현실이다.

취업한 소기업에서 만난 남편이 손가락 네 개를 잘리는 사고를 당했어도, 쩔쩔 매는 것 외에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직장동료들, 잘린 손가락을 말없이 수남의 주머니에 넣어주고 시치미를 떼는 사장, 이후 완전히 절망에 빠져 무기력하게 자신에게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남편의 존재 앞에서도 수남은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문배달, 명함홍보, 아파트 청소, 식당 주방일 등 그냐말로 ‘노오~~~력’을 하면서 남편이 소원했던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루려고 한다.

굼벵이처럼 오르는 임금소득보다 메뚜기처럼 뛰는 부동산 가격이라는 현실에 직면하여 수남은 은행대출 1억4천만 원을 받아 산꼭대기 작고 허름한 집 한채를 산다. 동네 재개발 과정에서 집은 수남의 유일하면서 마지막 희망으로 떠오른다. 부동산은 수남의 유일한 희망이며 또한 우리 모두의 희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부동산 투기를 ‘투자’로 포장한다. 내가 하면 투자이고 남이 하면 투기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부동산 투자에서 삶의 마지막 희망을 보는 수남의 모습을 편하게만 볼 수는 없다.   

자신의 마지막 희망 재개발 사업을 수사형사가 가장 결정적으로 위협하는 발언을 했을 때 수남은 가차없이 두 명의 형사를 칼로 죽인다. 감독이 의도했던 ‘약자 간 싸움’의 절정 양상이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순간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광기의 가장 극단적 모습일 듯하다.  

기생충에서 많은 사람들은 공공의 적으로서 ‘가진 자(부자)’를 보았다. 그러나 ‘엘리스’는 우리가 스스로, 그리고 서로를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구조를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도 없이, 개인으로서 내가 어떻게 ‘약자 대 약자’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지 한번 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래서 불편하다. 내 욕망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알려니 더 불편하다. 

영화가 천만 관객을 모으려면 관객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을 향하게 해야 한다. 내 스스로에게 향하게 하면 5만 관객도 힘들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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