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사진=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영화 「박화영」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보기 불편할 수 있는 영화다. 2017년 제작 완료하고 부산영화제 상영도 했다. 하지만 그 불편한 내용 때문에 개봉관을 찾지 못하다가 2018년에야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6천명도 안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을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을까?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이른바 ‘청소년 비행’ 현실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왜일까?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박화영은 청소년 1인 가구이다. 2018년 현재 전국 1인 가구 수는 5,848,594가구이다. 전체 19,979,188가구 중 29.3% 비율이다. 2천만 가구 중 6백만 가구, 즉 10가구 중 3가구가 1인 가구인 셈이다. 1인 가구 중 19세 이하 청소년 1인 가구는 58,154가구로서 전체 1인 가구의 1%가 채 안된다. 젊은 1인 가구가 많이 살고 있는 서울시의 경우도 19세 이하 청소년 1인 가구의 비중은 1.2% 수준이다. 전체 1,229,421 1인 가구 중 14,487가구이다(통계청 국가통계포털, https://kosis.kr/search/1인가구). 이렇듯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청소년 1인가구의 존재이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1인 가구 「박화영」의 삶은 한국사회 대중이 선뜻 인정하기가 힘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박화영은 학교에서 포기한 존재이다. 학생을 점수에 잘 맞춰 대학교에 보내는 결과로서 질적 수준을 인정받고 있는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박화영 같은 존재는 차라리 없는게 낫다. 교무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소란을 피우는 박화영을 학교는 어차피 포용할 수 있는 체계가 아니다. 처벌 자체를 포기한다. 박화영은 그렇게 완전한(?) 학교밖 청소년이 된다. 그런데 영재, 미정, 세진 등도 ‘사실상’ 학교밖 청소년이다. “네 얼굴이 뇌물인데...”라면서 미정의 조퇴를 당연히 하는 학교는 어차피 수시, 정시 입시 틀에 맞지 않는 청소년들을 포용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이렇게 가출ㆍ학교 밖 청소년이 된 이들은 함께 모여 살면서 성매매를 통해 용돈벌이를 한다. 어리고 예쁜 여자애를 찾는, 한국사회 남성들의 모습을 영화는 그대로 담아낸다. 그런데 그 ‘어른들’을 혼내주는 청소년들의 모습도 그리 개운치는 않다. 연령을 떠난 성착취 집단의 연결같은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인 내용은 ‘엄마’로서 박화영의 존재이다. 청소년 1인 가구 박화영에게 가족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존재이다. 박화영을 버려서 혹은 피해서 나간 엄마가 있다. 있으면서도 없는 엄마의 존재이다. 그 엄마의 모습은 상식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 엄마는 ‘나쁜 엄마’일까? 박화영이 혼자 사는 공간에 몰려든 청소년에게 박화영은 엄마가 되려고 하지만, 결국 엄마가 아니다. 영화 「박화영」은 모성 이데올로기ㆍ엄마다움 비틀기를 시도하는 영화이다. 그래서 압도적 다수가 불편해 하는 영화가 되었다. 단순히 청소년 비행에 초점을 맞추었더라면 그래도 몇 만명 관객은 찾는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신성불가침한 존재로서 ‘엄마, 어머니’를 건드려서 불편해할 독자가 있을 수 있다. 필자도 가슴에 묻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있다. 대학입시를 보러 가는 날 아침 내 엄마는 미역국을 끓여 주셨다. 아들의 공부 자체에 그리 큰 관심을 엄마는 갖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이 대학입시 날인지도 조차 모르고 단지 아들에게 모처럼 생긴 돈으로 소고기와 미역을 넣은 영양식(?)을 먹이려고 하셨을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대학입시 보러 가는 날 미역국이냐고 한마디 했지만, 엄마는 그냥 웃으셨다. 맛있게만 먹으면 된다는 대답과 함께. “성적보다도 인생 그냥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면 된다.”는 자식에 대한 믿음만이 있었다. 몇 달 뒤 남들이 ‘알아준다는’ 이른바 명문대학 입학 확정 후 엄마는 “교만하지 말고 너보다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라.”는 말 한마디 해주셨다. 그게 다였다. 막상 당신은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이 갖다주는 용돈을 써볼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육십밖에 안된 나이에 파킨즌 증후군이 발병하였다. 그리고 거의 20년 가까이 사람을 못알아보고 병상에 누워계시다 돌아가셨다. 그렇게 필자에게 ‘엄마’라는 단어가 가슴 속에 묻혀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은 다양하다. 사회는 그러한 다양함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나?

‘1인 가구 지원정책’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영역이 ‘원가족과의 관계’이다. 혼삶 이전 함께 살았던 가족을 ‘원가족(原家族)’이라 한다. 혼삶의 이유가 무엇이든 원가족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전제를 기존 1인 가구 지원정책은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원가족의 중심에 신성불가침으로서 ‘엄마’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를 봐서...” 참 많이 듣는 소리다. 그런데 가족, 게다가 엄마의 이름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희생을 요구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나?

자신의 공간에 모여든 청소년들에게 박화영은 ‘엄마’로서 존재감을 강조한다. 그런데 결국 주변 인물들은 「엄마가 엄마라며?」 하면서 살인 누명을 쓰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박화영’은 엄마의 역할을 한다. 살인자로서 교도소 생활을 한다. 가출청소년 사이에서 ‘엄마’를 자처하는 박화영은 엄마로서 정체성을 갖고 이렇게 온갖 굴욕을 이겨낸다. 교도소를 다녀온 후에도 변함없이 “아유, 씨발, 야, 너희들은 내(엄마)가 없었으면 어쩔 뻔 봤냐?”라고 끊임없이 물어보면서 ‘엄마’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그런데 결국 박화영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박화영을 이용할 뿐이다. 

‘신성한 모성, 신성한 엄마’를 이야기하면서 여성의 독박육아, 경력단절을 애써 눈감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영화 「박화영」에서 본다. 무한사랑 엄마를 한국사회가 강조하면 할수록 여성들은 비혼과 출산파업으로 대응하고 있다. 누가 앞장 서 조직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경험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 낳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여기에 더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빠’의 역할에 부담을 느끼는 남성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남성 = 가장, 세대주. 여성 = 아내, 내조자」 그림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사람들은 당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화이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은 바뀌고 있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영화 「박화영」이 비틀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봐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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