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칼럼]젠더질서의 밑바닥에서 공권력 물먹인 영화 「도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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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칼럼]젠더질서의 밑바닥에서 공권력 물먹인 영화 「도희야」
  • 정재훈
  • 승인 2020.10.0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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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도희야」는 2014년 개봉하였고 칸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다. 감독(정주리)과 출연자들이 이런저런 수상까지 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관객은 10만 명 정도 찾았다고 한다. 보기에 많이 불편한 장면들이 있어서일까? 

「도희야」는, 성소수자 이야기를 다룬 ‘퀴어 영화’로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더하여 「도희야」는 여성 1인가구 영화다. 성소수자와 1인가구 여성을 합하면 이 사회 젠더질서의 가장 밑바닥을 볼 수 있다. 「젠더질서」라고 하니까 좀 골치 아픈 이야기로 생각하실 수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젠더(gender), 즉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성 정체성으로 인하여 남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간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 젠더질서이다. 남녀 간 차별만 이야기하는 것이 젠더질서는 아니다. 

젠더질서라는 이야기를 하면 이미 “여성이 남성에 비해 차별받는다.”는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도희야」에 나오는 인도 출신 노동자 바킴이 바닷가 마을 아주머니들보다 더 못한 사람대접을 받는다. 바킴이 남자니까 아주머니들보다 더 사람대접을 받는 서열에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여자가 남자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젠더질서이다. 물론 대개는 여자 위에 남자가 있다. 

아들 용하(송새벽)의 폭력적 성향을 받아주고 이해하며 도희를 함께 학대하는 할머니는 용하보다 젠더질서 아래 서열이다. 여자들 위에 군림하고 아이를 폭력으로 대하는 용하의 남성성 앞에서 어머니는 순종적이며 (아들의 폭력을)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여성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 용하 위에 또 다른 남성들이 있다. 경찰서장을 위시한 경찰대 출신 남성 엘리트들이다. 세상이 남성가장에게 요구하는 능력을 모든 면에서 갖고 성소수자는 ‘똑바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성애적 신념으로 무장한 남성들이다. 젠더질서의 가장 서열을 차지하면서 용하 같은 남성들에게도 군림하는 존재다. 물론 여성 모두에게 군림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렇게 남성과 남성 사이에도 위계가 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당연히 위계가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위에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위계의 가장 밑에 있는 여성이 있다. 성소수자 여성이다. 남성 중 가장 낮은 위계에 있는 성소수자 남성은 그래도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보다 윗자리를 차지한다고 본다. 젠더폭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하나의 예이다. 그런데 성소수자 여성은 기존 사회 가치에 반하는 모습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에 차별을 더한 차별’을 받는다. 「도희야」 속 영남(배두나)의 모습이다. 

남성 엘리트 집단과 공유할 수 있는 경찰대 출신 엘리트라는 보호막도 용하가 내뱉고 하급경찰이나 마을사람들이 침묵하며 동의하는 쌍욕과 폭력적 행동 앞에서 그냥 날아가 버린다. 마을사람들에게 영남은 그냥 “소장 계급장 단 젊은 년‘일 뿐이다. 지나친 단순화를 할 수 있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경찰대 출신 엘리트 경찰 → 용하와 마을 남자들 → 마을 아주머니들 → 바킴 → 영남」으로 이어지는 젠더질서를 구성해볼 수 있다. 

‘평범ㆍ선량한’ 이웃들의 손가락질을 가장 받기 쉬운 젠더질서의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영남은 게다가 1인가구 여성이라서 더 차별받는다. 혼삶여성에 대해 많은 남자들이 갖고 있는 ‘성적 판타지’와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받아들이기 불편한 존재로서 영남은 가정폭력 피해아동을 돕기 위해 나섬으로써 다시 한번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평범한 마을사람들 속 악마성을 보여주었고, 무능력하면서 편견에 사로잡힌 공권력을 물먹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대사대로 “사람 구하기 힘들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데리고 왔다. 그렇지만 마을사람들에게 외국인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다. 한국‘사람’이 시키는대로 일할 때에만 사람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엄마가 아파서 집에 가야 해요.”라는 요구를 하는 순간 마구 때려도 되는 짐승 취급을 받을 뿐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학대하는 용하(송새벽)를 ‘공연히’ 건드리는 영남에게 마을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한다. 그렇게 구하기 힘든 사람을 너무나 당연하게 착취하는 우리의 ‘평범하고 선량한 이웃’의 모습이다. 용하에게 맞을대로 맞은 바킴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 지킨 자리는 경찰서 유치장이다. 누구나 무심코 넘어가는 당연한 모습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회의 상식과 규범에 따라 바킴의 자리는 ‘사람을 치료해주는 병실’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도희야」는 공권력을 조롱한 영화다. 2014년 당시의 모습이니 지금은 그렇지 않으리라 희망해본다. 자신을 도와준 영남은 유치장에 가두고, 자신을 때린 아버지는 집으로 돌려보내는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가를 도희(김새론)는 경험한다. 그래서 스스로 살길을 찾는다. 권의경 말대로 ‘어린 괴물’이 된다. 

공직사회의 ‘똑바른 기준’에서 볼 때 성소수자는 ‘감찰 대상’이고 똑바르게 살지 않는 존재이다. 영남의 사생활에 관심 없다면서도 경찰대 선배는 “공직사회 아닌가? 학교 명예도 있고...”라고 하면서, 무슨 병을 치료하기 위한 요양 보내듯이 1년의 시간을 영남에게 인심 쓰듯 준다. 공직사회 기준에 맞지도 않고 학교 명예를 실추시키는 존재가 학대피해 아동을 씻겨주고 치료해주니 문제가 된다. “동성애자가 그렇게 하니까 문제가 된다.” 영남은 “그 어떤 비정상적인 의도로 걔 옷을 벗기고 신체를 만진 적은 없습니다.”고 답한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그런 편견에 사로잡힌 질문에 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면 더 통쾌했을 것도 같다.

맥락을 파악하려는 의도 없이 단편적 질문만을 엮어서 아이의 ‘성추행 피해사실’을 진단해내는 전문가의 모습은 지금도 현장에서 학대피해아동을 위해 불철주야 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굴욕적일 수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씁쓸한 느낌이다. 국가가 놓치고 있는 많은 학대피해 아이들 보도가 지금도 이어지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럴까? 

인간의 개인적 취향이 사회적 낙인이 되고 학대피해자가 제대로 손을 내밀 곳이 없는 현실 앞에서 도희는 또다시 ‘괴물’이 된다. 성추행 뿐 아니라 할머니 죽음의 책임도 아빠에게 미루는 암시가 나온다. 그렇게 아빠를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고 영화를 세간의 평대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다. 사회가 외면한 혼삶여성 성소수자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곳 없이 혼자 된 아이가 ‘사회적 가족’을 완성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도희야」를 그냥 해피엔딩 영화로 보기에 찜찜한 구석이 있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성소수자 혼삶여성이 도망다니며 살아야 하지는 않는가? 학대피해아동이 여전히 국가의 도움 이전에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하지는 않는가? 공권력을 물 먹이는 「도희야」가 어느덧 과거로 흘러간 ‘추억의 영화’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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