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2018년 개봉한 「버닝(Burning)」은 말 그대로 ‘태우는’ 영화다. 청년이 청년을 태운다. 벤(스티븐 연)이 해미(전종서)를 태운 듯 하고, 종수(유아인)가 벤을 죽인 후 태운다. 벤은 ‘금수저’를 입에 물고 세상에 나온 청년이다. 해미와 종서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청년이다.

서울 강남 고급 빌라에 사는 벤은 ‘그냥 이것저것 하는,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의 구분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래서 결국 노는’ 금수저 청년이다. 부모 돈으로 최신형 포르쉐 몰고 고급 레스토랑 다니며 인생을 그냥 즐긴다. 그런 자신은 DNA(유전자)가 우수한 인간이다. 

이렇게 유전자가 우월한 인간은 눈물을 모른다. “눈물 흘리는 게 신기한... 내 기억 속에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어요.”라고 내뱉는다. 부모의 돈이 만들어 준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한국사회 금수저들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다.  

벤이 혼자 사는 그 넓은 집 손님 욕실에는 여자를 맞이할 모든 준비물이 갖추어져 있다. 물론 벤이 여장을 취미로 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화 흐름상 그런 암시는 나오지 않는다. 하는 일이 노는 일인 돈 많은 남자 청년 금수저에게 ‘여자를 소비하는 일상’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벤이 소비하는 여자 중 하나가 해미가 되었다. ‘메타포’가 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해미를 바라보는 벤의 시선은 경멸적이다. 그러나 잠시 소비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예쁜 여자’ 해미는 상관없다. 

성형수술해서 예뻐졌다고 스스럼없이 밝히는 해미는 이 시대 청년여성이다. 기성세대의 「헤픈 여자 콤플렉스」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감정이 허락하면 본인이 원하는 섹스를 하고 남자에게 먼저 콘돔을 사용하라고 건넬 수 있다. 벤의 돈 많은 친구들의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프리카 부시맨들의 춤을 선보이며 ‘리틀헝거’에서 ‘그레이트헝거’가 되는 꿈을 설명한다. 

해미는 남산 전망대에 반사되는 햇빛이 하루에 딱 한 번 잠시 들어오는 강북의 어느 북향집 원룸에 산다. 그러나 해미는 그냥 배고픈 리틀헝거가 아니다.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헝거다. 가난하지만 자유롭게 꿈꾸는 청년이다. 

자유가 좋은 해미는 생각도 낙천적이다. “문제야 항상 있잖아!” 해미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귤이 없어도 해미는 귤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돼. 중요한 건 귤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런 해미의 말을 감안하면 실제 영화에서 해미의 고양이가 존재하느냐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고양이가 있다는 해미의 생각이다. 그 고양이를 매개로 종수와 해미의 인연이 다시 맺어졌다.

중동에 건설노동자로 다녀와서 모은 돈으로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사지 않았던 아버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가득차서 분노조절장애를 갖게 된 아버지, 덤으로 가난까지 갖게 된 아버지, 그 아버지 때문에 집을 나간 엄마와 누나를 둔 종수는 ‘흙수저’ 청년이다. 흙수저 종수에게 금수저 벤은 ‘위대한 갯츠비’다. “어떻게 하면 저런 나이에 저렇게 살 수 있지? 위대한 갯츠비네... 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젊은 사람들... 한국에는 갯츠비들이 너무 많아.” 벤의 집에 처음 갔을 때 종수가 해미에게 하는 말이다.

자신에게는 사랑인 해미를 한순간 지나가는 재미로 소비했던 벤을 종수는 결국 죽여서 태운다. 해미의 실종이 계기가 되었다. 벤이 두 달에 한 번씩 취미로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처럼 해미도 죽여서 태웠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렇게 한국의 금수저 청년 한 명이 사라졌고 흙수저 청년 한 명은 살인자가 되었다.

영화 시작 부분에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의 청년 실업률이 가장 높다는 뉴스가 잠시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이어서 ‘위대한 아메리카’를 외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소식이 나온다. 

국회 의사당 무장 난입으로 절정에 이른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았다. 극심한 빈부격차, 버려진 사회적 약자들, 사라지는 중산층, 희망을 잃은 청년 등이 합쳐져 트럼프와 같은 선동가, 포퓰리스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바이든이 등장했지만 의사당 무장 난입이 절정이 아닌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냥 먼 나라 이야기일까? 헬조선 안에서 다수 흙수저와 소수 금수저로 갈라진 청년의 삶이 지속된다면 곧 우리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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