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한파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에게 너무도 잔인하다. 잔인함과 무정함은 죽음에서 더 극적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탯줄도 제대로 자르지 않은 아기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날은 그나마 있던 감정의 마지막 보호막마저도 무장해제당해 버린다. 

지난 1월 초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으로 시작된 "#정인아 미안해" 캠페인은 한국 사회에 아동학대와 유기에 대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자 언론은 무연고 아기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몇몇 언론사에서는 서울시 공영장례로 진행한 영아들의 사례를 통해 출생과 보육 과정에 있어서 우리 사회의 제도적 문제, 사각지대는 없는지 짚어본다며 사단법인 나눔과나눔으로 취재요청을 해왔다. 

한국 사회에서 무연고사망자는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낯선 주제다. 언론이 이를 취재한다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야 할 텐데, 무연고 아기 장례만큼은 선뜻 응하기가 어려웠다. 무연고 아기의 죽음은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둘러싼 다층적이고 복합적 관점이 필요하다. 우선 어떤 상황에서 임신했고 아기가 태어난 장소는 병원 아니면 집이었는지, 집이었다면 산모와 아기에 대한 제대로 된 의료적 조치가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또한 출산 후 부모의 정신건강과 아기의 건강 상태는 어떠했는지, 혹시 위급한 상황에서 공공기관 등에 도움을 요청할 정보와 시스템 등이 마련되어 있었는지도 살펴봐야 종합적인 판단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는 종종 아기를 유기한 부모를 손가락질한다. 그것도 주로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만 치우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지난해 서울시에서는 다섯 명의 아기를 위해 무연고 공영장례를 진행했다. 다섯 명 중 3명은 엄마가 시신을 위임했고, 두 명은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단순하게 무연고 아기들은 모두 아동학대와 유기라고 인식하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추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사회가 무연고사망자를 양산하는 사회구조를 견고히 하는 것과 유사하게 아이를 낳은 부모가 아이를 키울 수 없게, 그리고 유기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섯 명의 아기 중 두 명은 병원이 아닌, 모텔과 집에서 아기를 출산한 경우로 제대로 된 의료 조치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또 다른 세 명의 아기는 유기되었다가 사망했다. 하지만 이를 인면수심의 부모가 유기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 명은 '무뇌수두증(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뇌가 없고 척수액으로 가득 차 있는 희귀 선천적 기형)으로 태어났다. 다른 한 아기는 엄마가 관악구 베이비 박스에 아이를 맡기려 했지만, 베이비 박스 위치를 잘 못 알고 아기를 두고 갔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경우다. 마지막으로 한 명은 성북구 야산에서 발견된 아기였다. 이 아기 역시 탯줄 절단면이 불규칙했다. 다시 말하면 병원에서 아기를 출산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무연고 공영 장례./ 사진=나눔과나눔
무연고 공영 장례./ 사진=나눔과나눔

 

장례는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아기를 떠나보내는 장례는 더욱더 버겁다. 하지만 장례는 떠나는 이와 떠나보내는 이를 위한 시간이다. 지난해 다섯 명의 무연고 아기 중 단 한 명의 부모만이 장례에 참여했다. 그래서 아기 엄마가 더 걱정이다. 엄마는 평생 이 무거운 마음의 짐을 어떻게 지고 살아갈지 생각만 해도 답답하기만 하다. 누군가 곁에서 손 내밀어 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전화할 곳 단 한 곳만 있었어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상황에서 미혼모로 임신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아기를 유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 달 동안 아이를 품고 있었다. 가족은 물론 그 누구의 도움도 없는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태어난 아기가 제대로 된 의료 조치 부족, 또는 다양한 이유로 돌연사했다. 이성적이면 경찰에 신고하고 제대로 된 장례를 해야 했다. 과연 병원이 아닌 곳에서 혼자 아기를 낳은 엄마의 심신의 상태가 어떠했을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기구 또는 공공기관 중 어디에, 누구와 상담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좋을지 떠오르는 곳이 있는가? 결과적으로 아기를 유기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 여성만을 비난할 수 있을까?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며 여성을 손가락질한다. 이러한 비난과 손가락질이 일시적으로 우리의 감정을 해소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이 또 다른 아기의 사망을 막지 못할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시선이 향해야 하는 곳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들이 아기를 버리도록 만들고 있는 한국 사회로 돌려야 한다. 축복받지 말아야 할 생명이 어디 있을까? 사회는 이 생명을 함께 키울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롯이 여성에게만 그 책임을 전가하면서 손가락질을 하곤 한다.

무연고 아기 장례를 하며 뉴욕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는 1930년 미국의 경제공황 당시 상점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치고 절도 혐의로 기소된 노인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동시에 노인이 살기 위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방치한 책임을 물어 본인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과 방청객들에게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그는 판결을 선고하면서 "노인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은 혼자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도시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라과디아의 말처럼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아기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 사회는 젊은 여성이 아기를 낳고는 아기를 키울 수 없어 베이비 박스를 찾도록, 아기를 유기하도록 내버려 뒀다. 그리고 이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제 "#정인아 미안해" 캠페인을 통해 분출된 사회의 분노를 대안을 위한 에너지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이러한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수 있다.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여성이 안심하고 편안하게 의료접근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점은 무엇인지, 아울러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논의해야 한다. 그리고 출산 과정 혹은 출산 직후에 아기가 죽었다면 어디에, 누구와 상담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지 사회보장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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