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더 테이블」은 2017년 개봉한 독립영화다. 개봉관에서 영화를 찾은 관객 수가 10만 명을 약간 넘었다고 한다. 출연배우들의 면모가 우선 짱짱하다. 이들이 테이블에서 내뱉는 이야기들이 그냥 지나치기에 심상치 않다. 어느 날 하루, 한 카페의 창가 테이블에서 두 명의 사람들이 나눈 네 번의 이야기가 영화를 구성한다. 유명배우 유진(정유미)과 유진의 옛 남자친구 창석(정준원), 사귐을 막 시작하는 경진(정은채)과 민호(전성우), 결혼사기를 위해 만난 은희(한예리)와 숙희(김혜옥), 결혼을 앞둔 혜경(임수정)과 혜경의 현재진행형 남자친구 운철(연우진)이 테이블에서 나눈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 구성과 달리 경진과 민호, 혜경과 운철, 유진과 창석, 그리고 은희와 숙희의 순서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막 연애를 시작하는 경진과 민호, 연애 끝에 여자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면서 헤어지는 혜경과 운철, 20대에 사귀었다가 헤어진 후 새치가 나오기 시작하는 나이에 다시 만난 유진과 창석의 순서로 재구성이다. 마지막으로 여자와 여자의 만남으로서 은희와 숙희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영화 속 두 번째 이야기, 여기에서는 첫 번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경진과 민호다. 둘이 원나잇 스탠드(One-night stand) 이후 몇 개월 만에 처음 본 상황이다. 민호는 둘 사이의 하룻밤 이후 홀연 해외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경진 앞에 나타났다. “파리는 약간 큰 롯데월드 같아요.”라는 경진의 말에 프랑스 사람들은 기절초풍 할 것 같다. 나찌 히틀러 정권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습도 안했던 도시가 빠리다. 이렇게 당돌한 대사를 내뱉는 청년 민호는 사실 일자리 걱정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보통 청년이다. ‘여자를 먹여 살릴 능력도 없는’ 청년 민호가, 그런데, 이런 말을 한다.

“체코에서 산거에요. 누군가 쓴 걸 텐데. (시계를) 채워 드려도 돼요? 태엽으로 가는 건데 하루에 한번 씩 밥 줘야 돼요. 샀을 때 시간을 맞추고 태엽을 감은 건데, 그 후로 매일매일 태엽을 감은 건데요. 시계 봤을 때 선물하고 싶었거든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던 상황에서 만난 경진에게 상황 설명 없이 한국을 떠났던 민호는 “보일 때마다 사고 싶어서” 그리고 경진에게 주고 싶어서 체코에서는 인형을, 인도에서는 거울을, 독일에서는 카메라를 샀다. 모두 벼룩시장표다. 매일 시계태엽을 감으면서 경진을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집에 갈래요. 경진씨가 기자를 해도 좋은지 제가 음식점을 해도 좋은지 서로 알아봅시다.”라는 이야기로 테이블 대화를 마무리한다. 이에 경진은 “나이 많은 척 하지 말아요. 나보다 어리면서.”라고 말하면서 민호와 발걸음을 함께 한다. 두 사람의 테이블 대화는 이렇게 만남으로 완성된다. 
이 만남의 끝이 어떠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자가 여자보다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든가, 나이가 더 많아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 모습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느낌을 주는 테이블 이야기다. 

영화 속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 여기 두 번째 이야기를 혜경과 운철이 이어간다. 둘은 오래 사귀었지만 결국 경제적 조건에서 운철이 밀리고 혜경은 경제적 배경이 월등한 것으로 보이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영화 「더 테이블」을 치면 어디에서든지 따라 나오는 대사가 혜경의 입에서 나온다. “왜 마음 가는 길하고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지 모르겠어.” 

이유를 진짜 모를까?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남자는 여자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감정(사랑)을 앞세우는 존재인 듯 하지만, 적당하게 남자의 경제적 능력을 섞어서 혼인신고할 배우자를 고른다. 그래서 결혼식 날짜를 정한 후에도 남자와 밀당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를 차지하는 경쟁에서 능력(경제력) 열세로 밀린 남자는 더 이상 무리(?) 하지 않는다. 대신 선택을 한다. 결혼과 관계없이 만남을 지속하자는 혜경의 제안에 운철이 대답한다. “나 혜경씨 못 먹여 살려... 오늘 난 우리집으로 갈거야. 혜경씨는 혜경씨 집으로 가고. 이런 걸 선택이라고 하는거야.”

영화 속 첫 번째 이야기, 여기에서 세 번째 이야기다. 유명배우가 된 유진(정유미)이 테이블에서 옛 남자친구 창석과 마주한다. 「여배우들(2009)」에서 배우에는 ‘배우와 여배우’가 있음을 보여주었듯이, 유진은 젊은 외모로써 여배우로서 인기와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기간 동안 열심히 살아야 한다. 유진의 이야기다. “나 몇 년 안남았어. 열심히 살아야 해.” 

그러나 창석에게 유진은 ‘이런 여자를 사귀었을 정도로 자신이 능력 있는 사람’임을 회사 동료들에게 보여주는 좋은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옛 여자친구가 아닌, 증권가 찌라시에 나오는 ‘어떤 남자친구를 배신하고 어느 남자친구한테는 얻어맞고 대기업 회장님의 아이도 가졌던’ 유명 연예인으로서 유진이 테이블 앞에 있을 뿐이다. 

“우리 사진 한번만 같이 찍자. 증거사진... 자랑하려고 찍는 거 아냐. 추억이잖아.”라고 창석은 말한다. 그러나 이미 창석이 실제로 유명 연예인 유진을 만나는지 확인하려고 회사 사람들은 이미 카페 골목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여자를 ‘차지하는’ 순서가 경제력으로 결정되듯이, 이런 여자를 사귀었다는 능력의 과시가 남자에게는 중요하다. 그래서 창석의 추억은 “내가 이 정도 여자를 사귀었을 정도로 능력 있는 놈이었다.”로 변질되어 있다. 조건 없이 사람을 만나고 사귈 수 있었던 추억을 소환하려 했던 유진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두 사람은 테이블을 떠난다.

영화 속 세 번째, 여기에서 마지막 이야기다. 남자의 경제적 능력이 결혼의 전제조건임을 조롱하는 상징으로서 ‘결혼사기’ 전문가 두 사람이 테이블에 마주한다. 은희(한예리)와 숙희(김혜옥)다. 결혼사기 대상이 아닌, ‘능력 없는’ 남자에게서 사랑을 찾은 은희가 진짜 결혼을 하기 위해 숙희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결혼식 각본을 짜면서 가짜엄마 숙희와 가짜 딸 은희가 진짜 모녀가 되는 분위기가 흐른다. 은희가 진짜 엄마가 된 듯 하는 말이다. 

“우리 느림보 거북이, 잘 좀 부탁드려요. 애가 착한 데도 많은데 행동이 좀 굼뜨고, 어릴 때부터 느릿느릿 느려 터졌어요. 절대 게으른 거는 아닌데. 천성이 느린 데가 있는 아이니까, 느리지만 부지런한 아이니까, 우리 훌륭하신 시어른들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제가 애지중지 키웠으니까요.” 배우 김혜옥의 연기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만남에서 (경제적) 능력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음을 깨달은 남자는 사랑을 얻었다. 능력이 있어야 여자를 차지한다고 믿는 남자 하나는 사랑을 잃었고 또 다른 남자는 사랑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차버렸다. 남자의 능력을 사기로서 이용하던 여자는 그 기준을 버리는 순간 진정한 배우자를 얻었다. 게다가 진짜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변화해야 할 지 「더 테이블」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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