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데 아빠가 MZ세대 딸에게 ①우정에 대하여

나음 강한진 소장
나음 강한진 소장

띨롱~. 정확히 아침 6시 30분. 일주일에 두세 번. 몇 년째 친구가 보내주는 메시지 수신음이다. 마음을 끄는 글을 담담히 타이핑하고 음악을 넣었다. 그는 그냥 보내고 나도 그냥 받는다. 잘 받았다고 답장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어느덧 그 메시지는 바빠지려 할 때 나를 잠시 늦추고 생각을 심호흡시킨다. 메시지가 없는 날은 뭔가 빠진 기분일 때도 많다.

그 친구는 중학교 2학년 때 만났다. 검은 교복에 까까머리 까만 얼굴, 웃을 때 하얀 이가 빛났다.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다닐 때 그는 술보다 축구를 더 좋아했고, 운동하는 친구들이 대개 그렇듯 성격 좋고 두루 넓게 잘 어울렸다. 친구와 나, 아내 (당시 2년 후배)는 같은 써클 회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축구를 하던 친구가 많이 다쳤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한 후배가 아내에게 ‘선배가 많이 다쳐서 급히 수술을 받아야 한다’라고 (누가 다쳤는지는 말 안 하며)전화를 했다. 벼락 맞은 듯이 놀란 아내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런데 정작 다쳤다는 나는 멀쩡하니 병실 앞에 서 있더란다. 아내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 후 우리는 자연히 캠퍼스커플이 되었고 결혼을 했다(전화 한 그 후배가 결혼식 사회였다).

결국 친구는 그렇게 나와 아내를 연결해 준 사람도 되었다. 요즘도 아내는 친구가 몸을 바친 것이라며 웃는다. 

친구(親舊)는 친척과 벗을 의미하는 한자어 친고(親故)에서 시작된 명사라 한다. 형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족이며 친구는 우리가 선택하는 가족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기에 친구는 ‘성이 다른 가족’인 셈이다.

그런데 얼마 전 인터넷의 글을 읽다가 인친(인스타그램 친구), 페친(페이스북 친구), 트친(트위터 친구), 실친(오프라인 친구)으로 친구를 구분하는 이야기를 읽었다. SNS가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커진 요즘의 대인관계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실친(實親-현실사회의 친구)보다 온라인 친구를 더 좋아하는 이유를 접할 때는 좀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질척거림이 없다, 무리하게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된다, 답장할 의무가 없고 시간 맞춰 말하면 된다, 밥값 걱정이 없다, 안 맞으면 끊어도 된다 등등. 대인관계라는 것도 나의 선택의 대상이요 결과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내가 읽었던 ‘친구의 구분과 이유’는 지나치게 ‘나’에 집중되어 있다. ‘안 맞으면 끊어도 된다’는 말은 서늘하기까지 하다. 자기중심을 넘어 자폐로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사람의 인생은 일, 가정, 사회라는 세 개의 기둥이 지탱한다. 동료, 가족, 친구와 함께 내 나름의 기둥들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인생이다. 돌아보면 부끄럽게도 나의 기둥들, 그중에도 ‘사회 기둥’은 유난히 부실해 보인다. 힘이 넘치던 젊은 시절에는 대단한 것을 이룰 듯이 우쭐했고 열정에 휘둘리던 중년에는 앞으로만 내달리기 바빴다. 우정을 어떻게 쌓는지 모르고 방법 또한 서툴렀지만 ‘30살 넘으면 사회생활이 바빠져서 친구 만들기가 힘들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나만 생각했고, 직업적인 동료가 친구의 기둥을 대신해 줄 것이라고 편하게 기대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바라보니 친구와 동료는 그 자리가 다른 존재들이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외로움이라는 사회적 전염병이 갈수록 넓고 빠르게 전염되는 것 같다. 커뮤니케이션의 방법과 기회는 많아졌다는데 외로움은 도 더 커진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관계의 가치도 경제적인 기준으로 평가되고 조절되며, 우정이라는 것도 목표와 손익이라는 조건에 의해 등급화되고 성립되는 경우가 많아진다고 한다. 모든 인연에는 수명이 있고 저절로 가까웠다가 멀어지는 것이라며 친구에 대한 소회를 이야기하는 글을 읽은 기억도 난다. ‘삶은 친구 진열장이 아니며 친구는 외로움의 보험이 아니다’라며, 강해지면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우정에 대한 기대를 애써 낮추며 외로움을 선택하는 글쓴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면 ‘우정은 예술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며, 그 자체로 아름답고 우리의 내면을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이고 말하는 철학자 네하메스는 정 반대편의 끝에 서 있던 셈인 듯하다.

수십 년 전 우리는 재능과 능력과 의욕을 배합한 연료를 탱크에 가득 채우고 인생의 바다로 나온 요트와 같았다. 종일 바람을 거스르며 물을 갈랐다. 아직 갈 길은 먼데 벌써 노을이 내린다. 연료통도 거의 비어 이제는 돛과 노를 쓰면서 바람과 물결, 별들의 도움을 받으며 항해해야 할 것 같다. 무엇이 나의 돛과 노와 닻일까? 내 인생의 세 기둥 중 ‘가족 기둥’과 ‘사회 기둥’, 그 중에도 관계와 친구, 우정이 쌓아 올린 사회적 기둥인 것 같다. 친구들과 함께하지 않고 가꾸어지지 않는 인생은 즐거울 수가 없는 법, 그래서 ‘우정을 그 어떤 인간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라’라는 키케로의 충고가 더 마음을 울린다. 나는 아직 어리석고 성실하지 못해서, 공자가 말하는 세 가지 유익한 벗(友直, 友諒, 友多聞)과 세 가지 해로운 벗(友便壁,友旋柔,友便寧)을 논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다. 

그 시절 사진을 찾아보았다. 생각과 달리 친구의 모습이 많지 않다. 얼마 전 아들과 찍었다는 친구는 배가 나온, 그러나 그때의 미소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반 대머리의 아저씨가 되어 있다. 그는 내게 여러 번 친구가 되어 주었지만 나는 그에게 친구가 되려고 노력한 기억조차 별로 없어 부끄럽고 미안하다. 손가락 까닥하는 것만으로 친구를 만들 수 없으며 친구를 만들려면 최소한 시간이라도 들여야 한다고 자신을 꾸짖어 본다. 그래서 이 봄날 불쑥 그에게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별로 없어 데면데면 웃기만 하다가 돌아올 게 뻔하겠지만 하얀 치아로 빛날 그의 웃음을 보기만 해도 내 마음은 가득해질 것 같다. 누군가는 참 바보스럽다 여길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말이다.

선비의 교우 관계는 송백(松柏)과 같아서, 따뜻하다 하여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고 춥다고 하여 잎을 갈지 않는다 – 제갈량

[필자소개]

나음 강한진 소장은 경북대학교 공대에서 전자공학을,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과 상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국내 기업에서 엔지니어와 관리자 경험을 쌓고 지금은 나음연구소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대인관계와 소통, 특히 갈등을 긍정적인 계기와 에너지로 전환하는 지혜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강의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가정과 학교, 청년에게 있다고 믿으며, 가족의 평화와 학교(교사-학생-학부모)의 행복, 청년의 활력을 키우기 위한 일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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