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는 영국 사회보장제도를 소재로 2016년 나온 영화다. 같은 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육십이 다 된 나이에 아내와 직업을 모두 잃은 대신 심장병을 얻은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Dave Johns)가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정글 속에서 결국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간 이야기다. 영국 영화인데, 한국사회의 모습이 보인다.  

영화는 처음부터 규정에 사람의 상황을 구겨 넣는 고용센터(Jobcenter)의 노동능력테스트(work capability assessment) 장면을 보여준다. 다니엘은 심장발작 위험 때문에 일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고용센터 직원은 ‘다니엘의 사지가 멀쩡한 지’를 확인하는 질문지를 반복해서 읽을 뿐이다. 겉보기에 신체적으로 멀쩡한 다니엘은 질병수당의 일종인 고용지원수당(Employment and Support Allowance) 지급을 ‘당연히’ 거부당한다. 의사가 일을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는데, 고용센터에서 일할 능력을 다시 판단한 후 노동을 강요할 만큼 이상한 체계이다. 적어도 질병으로 인한 노동능력 유무 판단은 의사의 진단이 절대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일하지 않고 국가에서 주는 복지급여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영국사회에서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한국에는 질병수당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다. 의사가 일할 수 없다는 진단서를 써주어도 소용없다. 진단서 제출하고 사회보장 급여를 신청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 고용센터 직원의 경직되고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화가 날지 모르겠지만, 그 나라는 그래도 아파서 일 못할 때 생계비를 지원해주는 제도는 갖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질병수당 지급을 거부하는 공무원에 열 받는 영화를 볼 수 있을까?

실업급여의 일종인 구직자수당(Jobseeker's Allowance)을 받기 위해 다니엘은 구직 노력을 고용센터에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일자리를 얻었던 순간 심장발작을 우려한 의사의 판단 때문에 결국 일자리를 포기한다. 그런 다니엘을 고용센터에서는 구직활동을 더 하도록 오히려 압박한다. 한국의 고용센터에서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다.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일자리를 얻기 위해 다녀온 사업장 담당자 명함이라도 고용센터에 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 있다. 고용센터 상담직원(wokr coach)으로부터 더 열심히 구직하지 않으면 제재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온 다니엘은 고용센터 벽에 이렇게 적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죽기 전에 재심청구를 요구한다. 그리고 (고용센터 안내) 전화에 나오는 엿같은 대기음악을 바꿀 것도 요구한다(I Daniel Blake demand my appeal date before I starve, and change the shit music on the phone).” 우리 고용센터에서도 이런 항의 장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용센터 벽 문구를 보았을 때 지나가는 행인들의 반응이, 비록 영화 속 설정이긴 하지만, 우리에게서도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다니엘의 문구에 열광한다. 연대의식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나라 고용센터 벽에 누군가 비슷한 문구를 적는다면 지나가는 행인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까? 길거리에서 눈 깔고 남과 말 섞지 않는 게 예의인 사회에서 “내 일도 아닌데...” 정도 생각하고 대부분 그냥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시선 집중하느라 아예 그 문구 자체를 보지 못할 것이다. 혹시 본 사람 중 스마트폰으로 그 문구를 찍어서 어딘가에 올릴 경우는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연이 알려지고 사회적 반향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공감하는 행위는 이미 안면 있는 사이가 아니라면 사라진지 오래다.

다니엘은 두 아이를 혼자 키우는 젊은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스, Hayley Squires)를 만나면서 생활의 위안을 얻는다. 케이티의 딸 데이지(브리아나 샨, Briana Shann)가 “우릴 도와주셨죠? 그래서 저도 돕고 싶어요.”라는 말로 다니엘의 마음을 연다. 육십이 다 된 1인가구 장년남성과 한부모가족이 서로 돕고 사는 사이가 된다. 케이티는 다니엘의 장례식 때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를 읽는다.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의 절정이 담긴 내용이다. 케이티가 대신 읽은 다니엘의 마지막 편지에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다 들어가 있다. 

장년남성 1인 가구와 한부모가족이 서로의 어려운 처지를 공감하고 연대하며 도와가면서 사는 모습이 아무리 영화의 설정이라지만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가능할까? 이미 우리는 주거지원을 해도 청년 사는 지역 따로, 노인 사는 동네 따로, 한부모 사는 마을 따로, 연령 별 분리가 전제 조건인 경우가 흐름이다. 마치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을 구분하던 유행처럼 세대론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고 있다. 꼰대를 만들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도 처음 사람을 만날 때 나이를 기준으로 관계 정리를 한다. 그리고 자신보다 한 살이라도 나이 적은 사람에게 꼰대가 된다. 

삶이 힘들어졌을 때 지원해주는 사회보장제도의 보편성ㆍ포괄성이 아직 모자란다. 가족ㆍ친족 범위를 벗어난 남의 일에 대해서는 외면이 곧 예의다. 살고 있는 아파트야 당연한 기준이고, 나이만 달라도 가능한 한 말을 섞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인간을 사회보장 번호 정도로 인식하는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매정함을 읽는다. 그런데 그 매정한 사회보장제도조차 아직 없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한국의 다니엘 블레이크가 눈에 들어올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너무 눈을 깔고 예의 바르게(?) 살아간다. 혹은 스마트폰에 시선 집중하는 삶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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