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옥 나눔과나눔 사무국장
박진옥 나눔과나눔 사무국장

2018년 5월 10일, 서울특별시 공영장례조례에 따른 첫 번째 무연고공영장례가 진행됐다. 벌써 만으로 3년이 된 서울시 공영장례는 그동안 해마다 제도를 개선하며 사각지대를 줄여왔다. 2018년 362명이었던 장례인원은 2019년 423명을 거쳐 지난해에는 665명까지 증가했다. 그동안 무연고사망자 장례 현장에서 2천명이 넘는 분들을 배웅하면서 고민했던 현장의 이야기를 세 번으로 나눠보았다.

◇먼 길 떠날 채비를 마친 무연고사망자 시신

태어날 때 가족과 친지 그리고 이웃의 축복을 한 몸에 받았던 것처럼, 누구나 떠나는 순간에도 석별의 눈물과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며 따뜻한 배웅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떠나는 마지막 길 위에 홀로 임종을 맞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가족이 작성한 ‘시신처리위임서’ 한장이면 세상에 어느 한가닥 인연도 없었던 사람마냥 무연고자가 됩니다. 법률적 관계는 아니어도 살아오며 쌓아왔던 관계는 사치일 뿐입니다. 몇십년을 함께해도 ‘법적 권리’가 없으면 고인의 얼굴을 보는 것 조차 거부당합니다. ‘법적 가족’이 시신 인수 여부를 묻는 우편물을 받고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는 경우, 삼십 일을 꼬박 차가운 냉장고에서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겨우 무연고사망자가 먼 길 떠날 채비를 합니다. 수의를 입었지만, 입관식에 참관하는 이도 없이 차디찬 널빤지 위에 몸을 뉘었습니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운구차 사이로 승합차를 타고 서울시립승화원 화장장에 들어옵니다. 

운구를 할 차례. 고인과 생전 일면식도 없었던 자원봉사자가 위패를 들고 움직입니다. “이게 뭐야?” “영정사진도 없네.” 무연고사망자 장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단출하고 초라한 운구. 영정사진도 없이 위패만 들고, 보통 여섯 명이 드는 관을 세 명이 승합차에서 힘겹게 내리는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이상하고 낯선 장면일 뿐입니다.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들의 슬픔과 안타까움이 머무는 곳인 서울시립승화원,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오열하는 이도 없습니다. 어떤 이의 삶이 멈춰버린 이 순간, 그의 삶의 조각을 애써 모아봅니다.

서울시 공영장례 현장./ 사진=나눔과나눔
서울시 공영장례 현장./ 사진=나눔과나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무연고사망자

가족도 지인도 아닌 생면부지의 누군가의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여전히 낯설기만 합니다. 2011년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을 지키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보면서 오랜 시간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온 삶인데 가시는 소박하게라도 상을 차려 예쁘게 보내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장례지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들을 떠나보내며 자연스럽게 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기초생활수급자, 그리고 가족이 시신 인수를 포기한 무연고사망자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충격적이었던 건 무연고자들의 장례는 흔히 ‘무빈소 직장(直葬)’으로 ‘처리’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고인을 위한 장례의식도, 가족이나 지인들이 애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도 없이 안치실에서 화장장으로 바로 이동해 화장된다는 겁니다. 

이런 분들을 위한 장례를 진행하고 싶어 알아봤지만, 무연고사망자를 좀처럼 찾기 쉽지 않았습니다.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면 안 되는 존재처럼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2015년에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무연고 장례 지원인 공영장례 제안서를 제출해서 서울시와 함께 장례 지원을 시도했습니다. 여러 실무적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그래도 취지에 공감해주는 몇몇 구청의 협조 덕분에 무연고사망자 장례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시 공영장례 현장./ 사진=나눔과나눔
서울시 공영장례 현장./ 사진=나눔과나눔

 

◇티핑 포인트, 뜨거웠던 첫 포옹의 기억

그러다 무연고사망자 장례를 지금처럼 화장장에 마련된 무연고사망자 전용 빈소에서 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순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현상이 서서히 진행되다가 작은 요인으로 한순간 폭발하는 것을 ‘티핑 포인트’라고 하는데, 마치 그와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2016년 2월 초, 설을 며칠 앞두고 장례를 약속한 홀몸어르신들 집으로 방문해 안부와 선물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만 61세 여성이 거주지에서 ‘고립사’했다는 무연고사망자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분주한 와중에도 장례식장에 협조 요청을 하고 서둘러 장례식을 진행했습니다. 

일과를 모두 마치고 퇴근하는 길, 그날 장례식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자꾸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장례를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너무 형식적인 것 아니야? 장례는 원래 형식과 절차가 기본이야. 그래도 고인을 제대로 애도한 걸까? 목사님도 오셔서 기도도 해주고, 고인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그랬잖아. 아님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있지?’ 차분히 장례를 치르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자책과 이런저런 생각이 또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다음 날 무작정 화장장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현장에서 몇달 전 스치듯 인사를 나눴던 서울시 무연고사망자 운구를 담당하는 ‘반장님’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커피 한잔 대접에 유족대기실에서 우연히 조촐한 장례식도 진행할 수 있었고, 어제 장례식을 했던 여성분의 유골함을 받아들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골함이 봉안되는 ‘무연고 추모의 집’에도 처음으로 함께 따라갔습니다. 

그날 무연고사망자 유골함을 처음 받아들었던 순간은 잊을 수 없을 듯한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2월의 살을 에는 추위에 받아든 유골함은 따뜻했습니다. 아니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너무 놀랐습니다. 마치 20대에 뜨거웠던 첫 포옹의 기억과도 같이 뇌리에 새겨져 잊히지 않습니다. 시신과 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온기. 화장이 끝나고 유골이 그대로 담긴 사각의 플라스틱 함은 마치 고인의 살아생전 온기가 고스란히 담긴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놀라는 순간 나도 모르게 두 팔로 유골함을 꼭 끌어안았습니다. 정말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었습니다. 차갑고 생명력 없는 죽음이라는 단어에서 감히 떠올릴 수 없는 따뜻함, 무연고사망자라는 말에서 느낄 수 없는 온기가 매서운 날씨에 몸 구석구석으로 전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날 이후부터 무연고사망자 장례식을 서울시립승화원 화장장 유족대기실에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화장장에는 시신을 위임해 장례식장에는 차마 찾아오지 못했지만, 먼발치에서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보고 싶은 가족과 지인들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고인과의 접촉이 차단된 장례식장과는 달리, 화장장에서는 고인의 관을 화로로 봉송할 수 있고 ‘무연고 추모의 집’에 봉안하는 데 동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2016년 2월 초 만 61세의 여성분이 나를 화장장으로 불렀던 것은 아닐까, 우연치고는 너무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그분이 남긴 선물 같기도 합니다. 현재 서울시가 진행하는 서울시 무연고 공영장례는 화장장에서 진행되었던 방식을 모델로 제도화되었습니다. 분명 존재하지만 어디에서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무연고사망자 장례가 이제는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영장례가 되었습니다.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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