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아빠가 MZ세대 딸에게 ⑨"그냥 좀 피곤해서"

강한진 나음연구소 소장
강한진 나음연구소 소장

연애한다는 딸이 주말인데도 나가지 않고 집에 있다. 밖으로만 돌고 오리무중이 되어서 저녁만 되면 내 눈이 벽시계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던 녀석이, 방구석에 있다. 애인이 생겼다는 녀석이, 2주째 데이트를 안 하다니, 분명 이상 징조다. 

걱정되는 마음에 데이트 없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한다. 그냥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잠시 떨어져 있자고 했단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더니 짧은 대답이 돌아온다. 

"그냥 좀 피곤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유추해 보니 며칠 전, 사람 관계가 왜 이리 전쟁 같으냐던 녀석의 푸념이 떠올랐다. 녀석은 요즘 직장 상사 문제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 직장에서의 사람 관계는 숨 막히는 전쟁이다. 생존은 물론 자존감까지 걸려 있어 치열하다. 

그런데 녀석은 내적 고민을 아무에게나 털어놓고 하소연해서 해결할 성격이 아니다. 아무에게도 부담을 주거나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문제를 껴안고 동굴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아마도 남자친구는 녀석의 낯빛과 목소리가 어두워진 것을 보고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딸은 더 입이 무거워지고, 남자친구는 더 안타까워서 재차 물었을 것이다. 그러면 녀석은 더 미안하고 조심스러워졌겠지 싶다.  그리곤 아직은 덜 미덥기도 해서 한발 물러서려고 했을 게 분명하다. 힘든 속마음 털어놓다가 울음이라도 터지면 겨우 이 정도 사람이었나 생각할지도 몰라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차라리 잠시 떨어져 있는 게 나을 수 있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이런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연애 시절이 기억났다. 내 아내는 밀당을 못한다. 여우보다는 곰에 가깝다. 속이 천불 나도 상황을 모면하려고 둘러대거나 속이지 않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하고 한결같다. 그러고 보니 문제를 싸 들고 혼자 굴속으로 들어가는 딸은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런 아내가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한 적이 있다. 하루도 안 보면 못살 것 같던 캠퍼스 커플 시절의 어느 날, 아내가 난데없이 당분간 못 만날 것 같다고 했다. 왜?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언제까지? 혹시? 그러면서도 나는 대범한 척 알았다며 아내와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 날 모든 게 뒤죽박죽되어 버렸다. 해야 할 일, 들어야 하는 수업, 만날 약속 모두 중요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혹시 어디서 울고 있지는 않은지, 마음이 달라진 것은 아닌지 등등 갖은 생각이 맴돌고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아내의 집 앞 골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니 딸아이 남자친구의 기분이 살짝 이해되었다. 

30년 이상 지난 이야기지만 손에 쥔 핸드폰만 뺀다면 요즘 청춘남녀들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다시 딸과 대화하는 중 까똑까똑, 문자 진동, 전화수신 불빛으로 딸의 전화가 소란스러웠졌다. 남자친구가 분명하다. 시간이 필요한 이유를 알려줬느냐고 물어보니 아니란다. 부담 주고 싶지 않았다고. 그러는데 다시 메시지가 왔다. 밥 먹자고 한다며, 지금 집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딸에게 연애 시절 아내와 있었던 일을 짧게 이야기한 다음 말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귀찮게 할 수 있더라도 그냥 지금 네가 힘들다는 것은 말해주렴. 너도 힘든데 그 친구까지 힘들면 두 배로 손해잖아. 지금 그 친구는 널 돕고 싶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서 더 힘들지도 몰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노을 내리는 주말 저녁, 그렇게 딸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훨씬 편안한 표정이 되어서 돌아왔다.

세상은 전쟁터라고 한다. 이겨서 물리치고 빨라져서 앞서려고 한다. 아무도 덤비지 못할 위력과 강력한 무기를 갖추려고 애쓴다. 두려워 긴장하고 성벽을 높이 쌓으며 그 속에서 더 외로워진다. 어쩌면 외로움은 습성이 되어가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생각 외로 도움받기에 서투르다.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지, 나를 우습게 보지 않을지, 오해하지나 않을지 걱정되어 도와달라고 하지 못한다. 도와달라고 해 보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니 도와달라고 하는 방법을 모를 수도 있다. 

7살 손자는 블록을 좋아한다. 머릿속 그림을 블록으로 쌓아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5살 동생이 자꾸 방해한다. 형이 만드는 게 신기하고 부러운지 자꾸 건드려서 방해한다. 몇 번 하지 말라고 하다가 화를 내고 때려서 동생을 울린다. 그리고는 같이 운다. 망가진 블록을 모두 끌어안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린다.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쉬웠을 일일 텐데. 그래서 나는 요즘 손자들에게 "도와주세요~" 하는 것을 가르친다. 

 ▶필자는 마음을 연구하는 곳 나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통이 필요한 분은 언제든 메일(hjkangmg@hanmail.net)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소개]
나음 강한진 소장은 경북대학교 공대에서 전자공학을,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과 상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국내 기업에서 엔지니어와 관리자 경험을 쌓고 지금은 나음연구소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대인관계와 소통, 특히 갈등을 긍정적인 계기와 에너지로 전환하는 지혜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가정과 학교, 청년에게 있다고 믿으며, 가족의 평화와 학교(교사-학생-학부모)의 행복, 청년의 활력을 키우기 위한 일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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