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는 없다! ‘잡초’같은 사람은?

변산에서 흙을 만지는 철학자 윤구병는 ‘잡초는 없다’고 주장한다. 인디언들의 언어에도 '잡초'라는 말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혹은 내가 기르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잡초’이고, 내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니 ‘잡초’라고 부른다. 세상에 존재 이유가 없는 풀은 없다. 지금 나에게 쓸모없을 뿐이다. 

사람은 어떨까? 사람 역시 ‘잡초’같은 사람이 존재할까?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거나, 적어도 사회가 요구하는 필요한 교육을 마치지 못한 사람, 심지어 뚱뚱하거나 못생긴 사람,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상품가치에 부합하지 않아서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쓸모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흔히 ‘쓸모없다’고 치부된 사람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거나 ‘강제학살’하는 것은 문명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날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죽으면 장례는 어떠해야 할까? 

만약 조두순 같은 아동성폭력 범죄자가 무연고자가 된다면?

서울시 무연고사망자 장례를 지원하다 보면 한국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안타까운 가족사를 접하게 된다. 몇 년 전 겨울 화장장에서 1955년생 무연고사망자 시신을 운구하려고 할 때였다. 시신인수를 포기한 아내가 온다는 소식도 없이 화장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들려준 고인의 삶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둘째 출산 후 20일도 안 돼서 아내가 굉장히 아팠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남편이 그냥 집은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28년 만에 어느 반지하 월세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너무 괘씸해서 시신인수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안타깝고 슬픈 가족사다. 이렇게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신인수를 하지 않은 가족의 입장이 이해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족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 무연고사망자들, 한발 더 나아가서 만약에 ‘조두순 같은 아동성폭력 범죄자가 무연고사망자가 되었다면’ 서울시 공영장례로 장례를 해야할까? 서울시 예산으로 과연 조두순과 같은 인면수심의 사람의 장례를 치러야 할까? 이들을 구제역으로 살처분 매립되는 소·돼지처럼 그냥 땅에 묻거나 화장처리 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이들에게 장례식과 같은 장례절차와 고인예식은 그들의 삶을 비춰볼 때 과분한 것이고 사회적 낭비일까?

죽음의 타자성과 개인화를 넘어

죽음은 근대까지만 해도 사회적 현상, 즉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고 집단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자 집합적인 상징들과 의식들로 둘러싸여 있는 사건이었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은 ‘몸의 개인화’를 강조하게 되면서 죽음이 개인적 사건으로 축소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단지 죽은 사람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장례절차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면은 사회적 측면이다. 최소한 문명사회라면 고인이 어떠한 삶을 살았든 상관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유지하면서 삶을 마무리 짓도록 공동체적 차원에서 의식과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쓸모없는’ 사람조차도 구제역으로 살처분되는 소·돼지처럼 그냥 땅에 묻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소한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의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면은 개인적 측면이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의식과 절차를 진행하는 동안 가족과 지인들은 개인차원에서 그리고 감정적으로 돌아가신 분과의 희로애락을 정리한다. 그러면서 가족과 지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고, 마음속에 응어리진 회한을 풀 수 있게 된다.

감정적으로 본다면 꼴도 보기 싫은 가족의 시신을 인수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쓸모없는’ 사람을 위한 장례절차와 고인예식은 사회적 낭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장례절차의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보자. 너무나 괘씸해서 남편 시신인수를 거부했던 아내가 굳이 그 한 겨울 추위에 벽제에 있는 화장장까지 와서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왜 지켜봤을까? 장례를 마치고 돌아서는 아내는 혼자 말처럼 “후련해요 평생(생사여부를) 몰랐었는데 이제 알았으니까”라고 말했다. 만약 공영장례가 없었다면 아내는 남편과 이렇게 28년의 회한을 풀 수 있었을까? 

죽음은 단지 개인적 사건이 아니다. 사회적 현상, 즉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고 집단적 차원으로 접근해 야 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타자성과 개인화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사회는 가족의 유무와 무관하게 공공성을 갖춘 공영장례 절차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설령 돌아가신 이가 어떠한 삶을 살았던 관계없이 말이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과연 누가 누군가의 삶을 ‘쓸모없는’ 삶이라고 평가하고 규정할 수 있을까?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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