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청년 1인 가구 대상 욕구조사에서 늘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것이 ‘내 한 몸 쉴 수 있는 집(방)’이다. 특히 주거문제가 심각한 서울에서 더 그렇다. 서울시에서 다양한 1인 가구 지원사업을 내놓고 있지만, 주거 지원에 대한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린다. 그런데 2018년 개봉한 소공녀는 그 ‘욕구의 정설’을 뒤엎는 영화다. 그래서 영화 내용 자체가 현실적이지는 않다. 자칫 잘못 받아들이면 청년 1인 가구가 경험하는 주거문제의 심각성을 희석시킨다는 비난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웃자고 한 이야기를 죽자고 해석하지 말자. 영화가 던져주는 삶의 여유를 있는 그대로 즐겨보자.

공장 기숙사에서 기거하며 학자금 대출을 힘들게 갚아가는 미소의 남자 친구가 있다. 미소와 남친이 만나 영화를 보고 떡볶이와 순대라도 사먹으려면 헌혈을 해야 한다. 영화표를 사은품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소가 사는 방은 너무 추워서 둘이 사랑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봄에 하자.”고 미룬다. 바퀴벌레와의 동거는 기본이다. 그런데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여유가 흐른다. 지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상식으로 보기에 불편한 흐름이다.   

한국사회에서 보금자리, 투자, 투기 무엇으로 표현하든지 간에 사람들은 내집을 원한다. 그런데  소공녀 미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집(방)을 버린다. 1888년 나온 미국 소설 ‘소공녀’는 본래 부잣집 소녀가 잠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다시 부잣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2018년에 나온 한국영화 소공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꿀리는 모습이 없다.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거야.” 미소의 생각이고 생활이다.

위스키,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 이렇게 셋만 있으면 미소의 하루는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2천원짜리 담배가 4천5백원이 되고 월세가 5만원 오르자 미소는 위스키와 담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집을 포기한다. 그리고 ‘여행’을 떠난다. 학자금이 없어 결국 그만둔 대학교 시절 함께 밴드 활동을 했던 친구와 선후배 집이 여행지다. 찾아간 여행지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노~~오력하며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결혼한 친구는 시부모와 막무가내 남편 틈에서 고달픈 결혼생활을 한다. 밴드에서 드럼을 치던 후배는 결혼 8개월 만에 이혼을 했다. 그리고 월급 190만원 받아 아파트 대출금을 매달 100만원씩 20년 동안 갚으며 살아야 한다. 한다. “집이 아니고 감옥이야.” 울면서 내뱉은 말이다. 그런가하면 나이 서른을 넘기도록 부모 곁에서 사는 캥거루족도 있다. 현재의 부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물 한잔도 스스로 마시지 못하는 남편 시중을 군말없이 드는 결혼생활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옛 멤버들의 집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미소는 나온다. 그러나 처음 찾아갈 때 30개짜리 커다란 계란 한판을 늘 갖고 가는 여유를 미소는 나올 때에도 잊지 않는다. 청소도 완벽하게 하고 먹을 것도 차려놓은 후 감사의 카드를 남긴다. 달동네 꼭대기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방을 못구해도 미소의 여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청소도우미 일을 하러 간 민지의 집에서도 “밥은 먹었어요?”라는 배려의 인사말을 던진다. 미소가 준비한 닭백숙 ‘소셜 다이닝’은 임신을 했는데 애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민지의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날려준다.

남자친구가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둘이 함께 살만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겠다며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지만, 남자친구와의 재회 관련 암시를 찾기 어렵다. 미소의 행복을 만들어주는 「위스키, 담배, 남자친구」 이렇게 셋 중 하나가 사라졌을 뿐이다. 서울의 어느 한 구석에서 청소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위스키를 마시면서 서울의 화려한 고층빌딩을 배경으로 하는 천막에 있는 미소의 모습이 영화의 끝을 장식한다.

모두가 앞만 보고 경쟁과 업적, 그리고 보상을 욕망하며 달려 나아 갈 때 소공녀 미소는 담배 하나 물고 위스키를 마시면서 반대방향으로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몇 년간 아껴왔던 12년산 위스키(글렌피디)를 땄다. 맛있다. 미소가 전하려던 행복이 이건가? 독자들의 반응이 어떨까를 늘 염려하면서 글쓰기를 마치곤 했다. 지금은 그런 걱정이 없다. 맛있는 위스키 한 잔을 더 하기 때문이다. 미소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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