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진 나음연구소 소장
강한진 나음연구소 소장

딸의 결혼 날이 두어 주 앞으로 다가왔다. 평생 혼자 살 듯하던 녀석이 결혼하겠다고 불쑥 선언해서 모두를 놀라게 한 지도 제법 되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싶으니 마음이 나날이 바빠진다. 

요즘 눈이 부쩍 흐릿하고 뭔가 낀 듯하여 눈을 자주 비비고 안경을 벗어서 닦는다. 오늘은 결혼식도 다가오니 안경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안경 가게에 들러 시력검사를 하는데 딸이 드레스 피팅을 하는 중이라며 핸드폰 사진을 여러 장 보냈다. 그리고 어느 것이 제일 예쁘냐고 물었다. 눈처럼 하얀 드레스에 은빛 관을 쓰고 수줍은 듯 꿈꾸는 듯 웃는 모습 모두가 예뻤다. 고르지 못하고 사진을 앞뒤로 뒤적이는데 직원이 “딸 시집보내며 우는 아버지가 많다던데, 손님은 어떠세요?”라고 물었다. 순간 왠지 들킨 기분이 들었다. 얼른 내가 울 사람으로 보이느냐며 시치미를 떼고 서둘러 렌즈와 안경테를 고르고 나왔다. 막 가을을 벗어나는 거리에는 바람이 흐르고 울겠느냐던 직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눈 주위가 살짝 뻑뻑해진 느낌이 들었다.

중년 부부가 웃으며 지나갔다. 저들은 언제 결혼했을까. 내가 결혼한 지는 벌써 30년이 넘게 시간이 흘렀다. 대학 캠퍼스에서 아내를 만난 나는 졸업이 가까운 어느 날 장인어른을 뵙고 결혼을 허락받았다. 그런데 취직만 되었을 뿐 빈손이던 나는 결혼 준비를 변변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겨우 공단 주변에 작은 전세방 하나를 얻은 것뿐이었다. 

신혼 차릴 집을 구했다고 연락을 드렸더니 며칠 후 장인어른이 장롱과 진열장, 냉장고, TV, 쌀통, 쌀 한 가마니까지 싣고 고속도로를 달려오셨다. 그리고 그 방을 손수 가득 채워 주셨다. 식사하고 가시라고 했으나 마다하시고, 가는 길에 음료수라도 드시라며 쥐여드린 지폐 몇 장만 못 이겨 받고는 웃으며 용달차 조수석에 앉으셨다.

장인어른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 오래 후, 그날 돌아오신 장인어른이 자꾸 빙긋이 웃더라고 장모님이 말씀하셨다. 그때 들여주신 가구는 지금도 안방을 지키고 있다. 그동안 금이 가고 낡았어도 정이 들고 장인어른 생각이 나서 버릴 수가 없다. 

건널목 앞 사진관 윈도우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할머니가 보였다. 턱시도를 입은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부끄러운 듯 웃고 있다. 리마인드 웨딩인가보다. 할머니가 작은고모를 닮았다. 작은고모는 내가 다섯 살 무렵에 시집을 갔다. 오래전 제주의 풍습대로 이레(7일) 동안 동네가 모두 모여 돕고 축하하는 혼례 잔치가 이레(7일)간 열렸다. 그 무렵 제주의 딸 가진 부모들은 평소에 ‘수눌음’에 참여해서 이웃들과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를 만들고 울타리 안의 통시(화장실 겸용 돼지우리)에 돼지를 여러 마리 키우며 혼례를 준비했다. 그리고 혼인날이 정해지면 아버지는 아름드리 굴무기 낭(굴무기=느티, 낭=나무)을 베어다가 궤(櫃)를 만들었다. 

잔치 다섯째 날, 아버지는 예물과 혼수, 화장품 등을 궤에 넣고 우시(사돈집을 방문하는 집안 대표의 일원)에게 지워서 사돈집으로 간다. 사돈과 동네 어른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대접받은 아버지는 딸에게 궤를 주면서 ‘이제부터는 여기가 네 집이다. 잘 살아라’라고 말하고는 돌아서 나온다. 먼 산 보며 헛기침도 크게 하고 평소보다 훨씬 빨라진 걸음으로. 어느 해 명절에 작은고모는 글썽이는 눈으로 세월을 더듬으면서 그날 멀어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고 추억했다.

시내를 막 빠져나오는 길모퉁이에 가구점이 보였다. 끌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구석구석 온갖 가구가 자리해 있었다. 모두 꼭 필요한 것들이다. 어찌 이리도 잘 만들었을까. 나지막한 반닫이, 고풍스러운 작은 경대, 귀해 보이는 보석함도 보인다. 이놈은 화장대에 두면 참 좋겠다. 이미 아내가 좋은 가구를 잘 골라 보냈다는데 혹시 빠진 것은 없는가 되짚어 보려 해도 생각이 잘 잡히지 않는다.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오려는데 장식장 하나가 유난히 내 눈을 잡아끈다.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30년 전 장인어른이 주신 것처럼 고급스러우면서 다정하다. 유리가 끼워진 문을 살짝 열어봤다. 향긋한 나무 향 위에 딸이 쌓아갈 행복의 열매들이 보이는 듯했다

저녁이 다 된 시간, 집은 비어 있다. 창밖 저쪽 백 살이 넘은 듯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노을을 지고 실루엣을 키우고 있다. 30년 전 장인어른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고속도로를 오르내리셨을까. 60년 전 저 나무로 궤를 만들 때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나무 그림자 위로 두 분 모습이 겹쳐지고, 하얀 드레스에 은빛 관은 쓴 딸아이가 걸어온다.

며칠 뒤면 저 아이의 손을 잡고 예식장의 붉은 카펫 위를 걷게 되겠지. 그날, 딸이 장미꽃처럼 화사하게 웃으면 참 예쁘겠다. 잇몸을 보이며 소리 내어 웃어도 좋겠다. 바보처럼 엄마 아빠를 보며 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매일 조금씩 웃음이 자라는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녀석을 멀리 서라도 오래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다. 

장인어른과 할아버지의 저릿한 마음 위로 토막토막 바람들이 떠오르며 뻑뻑한 눈이 더워졌다. 깊게 숨을 내쉬고 침을 삼켰다. 콧등까지 올라왔던 더운 덩어리가 뒤로 넘어가더니 목젖을 지나 천천히 내려가고 있다.

▶필자는 마음을 연구하는 곳 나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통이 필요한 분은 언제든 메일(hjkangmg@hanmail.net)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소개]

나음 강한진 소장은 경북대학교 공대에서 전자공학을,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과 상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국내 기업에서 엔지니어와 관리자 경험을 쌓고 지금은 나음연구소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대인관계와 소통, 특히 갈등을 긍정적인 계기와 에너지로 전환하는 지혜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가정과 학교, 청년에게 있다고 믿으며, 가족의 평화와 학교(교사-학생-학부모)의 행복, 청년의 활력을 키우기 위한 일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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