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화 칼럼니스트
한유화 칼럼니스트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을 떠날 예정이지만, 혼자 사는 1인 가정에서는 가장인 내가 집을 비우면 나의 semi-가족이었던 식물과의 반려(伴侶)는 거기서 끝이 난다. 내가 강아지나 고양이와 함께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배우자나 자식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하다 못해 식물과도 반려하기 어려운 게 현재의 내 삶이라니! 

봄이 되어 로즈마리 화분을 데려왔다. 스테이크를 구울 때 가차 없이 사지를 부러뜨려 넣을 생각이다. 케일은 씨앗으로 사 와서 대충 뿌려뒀는데도 반가운 잎사귀가 나왔다. 새싹 어린 티만 벗으면 바로 샐러드를 만들어줄 생각이다. 이런 잔혹한 미래를 꿈꾸며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룰루랄라 즐겁다. 흙바닥이 꿀꺽꿀꺽 물을 빨아들이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면 퇴근 후 냉장고 앞에서 선 채로 캔맥주를 들이켜는 그 기분이 상상돼서 저절로 속이 시원해진다.   

하지만 내가 돌아오면 다시는 이들의 싱그러운 모습은 없을 것이다. 두 손 놓고 이들을 죽게 놔둘 수는 없다. 가정용 자동급수 시스템을 찾아내거나 당근마켓에서 화분 물 주기 계모임이라도 만들어야겠다. 육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반려식물을 키우겠다는 이유만으로 가족 곁으로 이사를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화분이 목마른 건 그나마 낫다. 사람인 내가 목마를 때가 고역이다. 찐득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네 친구와 맥주 한잔 하고 싶어질 때, 그 목마름이 진짜 문제다. 접근성을 기반으로 한 '동네 친구'의 핵심은 ①죄책감 없이 ②아무 때나 불러내는 즉흥성을 발휘할 수 있고, 수시로 ③숏 콘텐츠를 기획하기가 용이하다는 점 아닐까.

①죄책감 없이

'에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라고 하나' 싶은 생각은 물론이고 괜히 부정적인 기운만 전파하는 건 싫다고 여겨서 아예 누군가를 찾지도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동네 친구가 있을 때는 다르다.

②즉흥성

거창한 계기 없이 담백하게 만남을 청할 수 있고, 정서적으로 매우 지쳐있는 어느 날에도 내가 슝-하고 행차할 수 있다.

③숏 콘텐츠

막상 만나서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집에 가서 얼른 씻고 쉬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그 또한 아주 적은 죄책감만으로 결단할 수 있다. 30분만 얼굴 보고 헤어지는 날도 잦다. 배달음식을 넉넉하게 시킨 어느 날에 갑작스럽게 만나서 밥만 먹고 헤어질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반찬통에 음식만 받아 들고 집에 갈 수도 있다.

동네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 세 가지의 핵심을 충족하는 대체자원이나 방법을 찾는 것도 좋다. 접근성을 개선하려는 노력으로 운전을 배우고 차를 사거나, 가상공간에서의 교류를 강화한다거나. 거리가 좀 멀더라도 죄책감을 덜고 편하게 부를 수 있는 맹약으로 맺어진 네트워크를 만들거나.  

지금의 내 일상은 비교적 평안하기에 화분을 먹이는 일 정도만이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하지만 머지않아 'urgent' 단계의 긴급하고 위중한 일들로 누군가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순간들이 늘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한 사람의 일상을 지탱하기 위한 방법을 준비하고 해결책을 찾는 과정은, 결혼하지 않는 '혼삶'뿐만이 아닌 모든 삶이 성숙해 가는 시기에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가족과 함께 산다고 해도 유사한 고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 대신 화분에 물을 주거나 택배를 받아주는 등의 품앗이를 위한 존재가 아니기에. 물론 가족끼리 돕고 사는 것 자체는 참 따뜻한 일이므로 가족을 노동력으로 환산해서 나의 필요를 손쉽게 해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혼자가 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은가. 혼자일 때 잘 지낼 수 있는 준비를 하지 않은 채 노년을 맞이한다면,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자체에 아쉬워하기보다 내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에 대한 대책이 없어서 안절부절못하게 될까 봐 두렵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확보해야 했던 또 하나의 절대적 자원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사람’이다. 먹는 쾌감을 느껴야 음식을 찾듯 사람이라는 절대적 생존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을 아주 좋아해야 한다. - 책 <행복의 기원> (서은국 지음) 中

사람에게 있어서 사람은 생존 필수품이다. 위 책에서 저자는 '사회적 영양실조'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왕성한 '사회적 식욕'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탁월한 비유가 아닌가!) 친구가 '집이냐?' 물어보면 당장이라도 후드 티를 주워 입고 호다다닥 술자리에 달려 나갈 만큼 '사회적 식욕'이 왕성했던 때도 있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의 매력에 한번 빠지게 되면 그 부작용으로 간혹 '사회적 식욕 감퇴' 증상을 겪기도 한다. 

말 그대로 '배가 불러서' 욕구가 적어지는 경우도 있다. 연속으로 쉬지 않고 저녁 약속이 있는 기간에는 매일 급하게 골라 입고 던져둔 옷가지가 쌓이고, 외식으로 차곡차곡 적립한 열량도 지방으로 쌓이고, 미처 배출하지 못한 '대화의 독'도 쌓인다. 들숨만 계속 쉬고 날숨을 못 뱉는 것과 같은 기분이 된다. 

주말마다 지인들 경조사를 돌아다니며 숱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하루 종일 전화를 받아야 하는 일을 한다거나 극도로 세분화된 카카오톡 단체 톡방을 이리저리 종횡무진하는 일상을 겪다 보면 나는 배가 터질 것 같다고 느낀다.

'배 부른 인간관계'를 계속해서 '사회적 영양 과다' 상태가 되면 의도적으로 식이조절을 하듯이 '영양가가 적은 인간관계'는 조금씩 줄여나갈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인간관계를 잘 다뤄나갈 만한 '소화 능력'이 점점 떨어지면서 '배가 고파도' 식욕이 안 생기는 증상이 생긴다면 잠깐 스스로의 상태를 진중하게 들여다보는 게 좋다. 이러한 증상이 지나치게 잦거나 길어진다고 느낀다면 '사회적 영양실조'를 염려해야 할 시기다. 나는 혹시 사회적 식욕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혼삶을 살게 되었는가? 나는 '사회적 고립 상태'에 놓여있지 않은가? 

'인간은 어차피 혼자다.' 

이 문장이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그러니 타인은 지옥이고 아무도 필요 없다'로 풀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오역일 것이다. 철학적으로 혹은 현실적으로 인생은 결국 혼자만의 것이라고 느낀다 해도 그것이 내가 인간관계에서 회피하고, 숨어들고, 끝내 고립되기까지 하는 것의 핑계로 삼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힘내서 우리랑 어울리는 걸 찾아다닙니다". 

내가 아주 애정하는 한 카페(전주, '평화와 평화')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부드러운 문체에 묻어있는 강인함이 느껴져서 문장을 눈에 담자마자 용기가 샘솟아 발바닥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혼삶을 살면서 '내가 이상한 건가' 싶거나 스스로가 비주류라고 느껴질 때는 나와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보는 경험도 도움이 된다. 준비해야 할 것들, 비판해야 할 것들에 대한 철저함과 날카로움은 더 힘을 얻게 되고 반대로 괜히 습관처럼 가지고 있던 minor한 피해의식은 꼭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옅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동지들을 통해 힘을 얻었다면 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적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좋다.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비슷한 가치를 칭송하는 확증 편향에 갇히지 않고 보다 다채로운 혼삶을 즐기기 위한 필수 영양소다. 많은 다른 것들이 그러하듯, 혼삶도 탄탄한 인간관계와 정서적인 뿌리를 기반으로 할 때 더욱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저자 소개] 네이버 블로그 <직장인 띄엄띄엄 세계여행> 운영, 34개국 250여 회 #혼행 전문 여행블로거 

'남의집' 소셜링 모임 <여행블로거의 혼삶가이드>의 호스트

혼삶이 두렵지 않은 합기도 4단, 23년 경력의 '무술인'

현) 비욘드바운더리 글로벌 커머스 본부장

전) 이랜드차이나 상해 주재원, 중국 리테일 런칭 전략기획 

후) 독립출판 레이블 리더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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