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천재 삼총사⑮

조조의 오환 정벌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고생스러웠고 식량과 물이 없어서 많은 병사가 희생되었으며 가장 사랑하는 책사 곽가마저 잃은 힘든 과업이었다. 그러나 오환 정벌로 청주지역이 완전히 평정되어 하북 지역이 완전히 장악되었다. 공융은 조조가 황제를 직접 위협하는 세력으로 완전히 자리 잡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 했는지 허도를 중심으로 천 리 이내에는 제후를 봉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건의했고, 이 일은 조조가 공융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된 듯하다.  

공융이 55세인 208년 1월, 조조가 오환 정벌에서 돌아오자마자 형주 정벌을 준비한다. 우선 형주 정벌에 필요한 수군을 양성할 지휘관을 파견했고, 몇 달 뒤에는 조정의 삼공을 폐하고 스스로 승상의 지위에 올라 조정 지배력을 더욱 강화한다. 사실 조조는 10년 전인 198년에 형주 정벌을 했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때도 공융은 반대했는데 지금도 또 반대를 한다. 유표의 세력이 매우 강해서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었다. 삼국지연의는 조조가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자 포기하고 승상부의 문을 나서는 공융이 하늘을 우러러 "어질지 못한 자가 어진 자를 치니 어찌 패하지 않으랴"하고 탄식하는 모습을 전한다. 

여기서 어진 자와 어질지 못한 자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하다. 공융은 조조를 어질지 못한 자, 즉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불충한 자이고 유표를 어진 자, 즉 황제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충성된 자라는 설정을 하고 상황을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다가 조조의 패배는 하늘의 뜻이라는 악담까지 덧붙였다. 

누군가 그것을 조조에게 고자질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조조는 공융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치려를 어사대부(요즘의 검찰총장)에 임명한다.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있어야 한자리할 수 있다. 치려는 잘 알아서 기었고 공융 제거작업은 시작된다.

예정대로 조조는 형주 정벌을 떠났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지 형주에 도착할 무렵 유표가 병으로 죽고 뒤를 이은 아들 유종이 제 발로 항복해 와서 쉽게 형주를 차지한다. 208년 9월이었다. 내킨 김에 계속 남하해서 208년 10월에는 유비-손권 연합군과 적벽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사실 적벽대전에 대한 삼국지연의와 정사 및 다른 기록들은 차이가 크다. 많은 기록이 적벽은 그리 큰 싸움이 아니었고 조조의 피해도 크지 않았으며, 패전의 원인도 주유의 화공이 아니라 전염병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패배의 원인이었든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는 형주를 지키려고 하지 않고 바로 철수를 한다. 지키려다가는 더 큰 손실을 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조조는 당분간 군사행동도 중단하고 내정에 전념한다. 이 적벽대전을 기점으로 위나라에 맞서서 촉-오가 연합 경쟁하는 삼국정립 체제가 굳어졌다.       

형주 정벌 전부터 치려가 시작한 공융 제거 작업은 208년 말 조조가 돌아오고 본격적으로 빨라진 것으로 보인다. 치려는 조조의 의도에 충실하게 죄를 날조해서 고발했고 공융은 파직되었다. 그러자 조조가 나서서 상황을 중재하는 척 회유하려 했으나 공융은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조조는 수하에게 공융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 죄목이 대단하다.     

첫째, 예전에 북해에 있을 때 황실이 안정되지 못함을 보고 무리를 끌어모아 불궤를 꾀하면서 "내 공자의 후손으로 조상은 송나라에서 멸문을 당했었다. 천하를 소유할 자가 어찌 묘금도(卯金刀-劉자를 풀어쓴 것)만 있겠느냐"라고 말해 유 씨가 아닌 자신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불충의 말을 한 죄.

둘째, 동오의 손권이 보낸 사신과 개인적인 대화를 하면서 조정을 비방해 나라의 체통을 손상한 죄.

셋째, 구경(九卿)의 반열에 있는 자가 조정의 논의를 지키지 않고 맨머리에 미복으로 당돌하게 궁궐을 돌아다녀 예를 지키지 않은 죄.

넷째, 예전에 예형과 대화할 때 예형이 "중니(공자)께서 죽지 않으셨습니다"라고 하자 공융이 "안회(공자의 수제자)가 다시 살아났구려"라고 맞장구치며 성인을 모독한 죄.

다섯째, "아버지가 자식에게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본래 의미를 논한다면 실상 부부 사이의 욕정이 나타났을 뿐이 아닌가. 자식이 어머니에게 또한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비유컨대 물건을 병 속에 두었다가 꺼내면 병과 떨어져 상관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말하면서 효를 부정하고 불효를 저지른 죄.     

이렇게 불효 불충 대역무도한 죄인으로 상주된 공융은 하옥되었고 아내와 자식까지 모두 처형된다. 과거 북해상 시절에서 불충을 모함하고 10여 년 이상 지난 사적인 대화에서 불효를 끄집어낸 것이 눈에 두드러진다. 공자의 20대 자손으로 유가적 가치관 속에서 살아온 공융의 존재 근거 자체를 완전히 해체해서 죽음보다 더 가혹한 모함을 한 것이다. 과연 공융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죄목이라야 쓰러뜨릴 수 있는 대단한 존재였을까? 조조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죄목으로 공융을 제거해야만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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