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융은 삼국지 이야기의 앞부분에서 공자의 후손으로 유가적 가치관에 충실하게 황제에게 충성하는 삶을 살려고 한 청류파 지식인의 한 사람이나 영웅 이야기에 가려져 눈에 잘 띄지 않는 캐릭터다. 그는 십상시-하진-동탁-이각과 곽사-조조로 이어지는 권력자들과 이어진 관직 생활을 했는데 그들에겐 제법 성가신 존재였다. 그가 비판자가 된 것은 황제 보위가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힘없는 문신으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는 선택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후한서를 지은 범엽은 공융이 죽임을 당한 이유로 조비가 원소의 며느리를 첩으로 맞은 것에 대해 무왕
삼국지 초기 반동탁 연합군인 18로 제후군이 지리멸렬하게 무너지고 난 다음 조조는 능력을 발휘해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었다. 그러던 193년, 조조가 원술과 싸우는 중인데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서주 자사 도겸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도겸은 인근의 도적 떼와 전략적으로 연합하고 있었는데 도적 출신 병사들이 영주와 서주의 경계 지역을 약탈하는 못된 짓을 자주 저지르곤 했던 것이다. 조조는 원술 격파를 마친 뒤 가을에 대규모 군사로 도겸을 격파하고 10여 개의 성을 점령하는데, 이 과정에서 시체가 강을 메울 정도로
조조의 오환 정벌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고생스러웠고 식량과 물이 없어서 많은 병사가 희생되었으며 가장 사랑하는 책사 곽가마저 잃은 힘든 과업이었다. 그러나 오환 정벌로 청주지역이 완전히 평정되어 하북 지역이 완전히 장악되었다. 공융은 조조가 황제를 직접 위협하는 세력으로 완전히 자리 잡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 했는지 허도를 중심으로 천 리 이내에는 제후를 봉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건의했고, 이 일은 조조가 공융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된 듯하다. 공융이 55세인 208년 1월, 조조가 오환 정벌에서 돌아오자마자 형
조조는 관도대전과 여양 전투를 이기고 204년 원소의 근거지인 업성을 점령해서 최강자가 되었다. 어쩌면 공융은 자신이 그런 조조 앞에 서 있는 당랑거철(螳螂拒轍-달려오는 수레를 가로막고 서 있는 사마귀)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을까. 서서히 그의 누적된 불만이 조조의 인격에 대한 비꼼과 비난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조는 원소를 물리친 후 한동안 하북 지방 평정에 전념했다. 그 마무리가 오환정벌이다. 오환 지방은 흉노족들이 거주하던 장성 이북을 말한다. 흉노족은 가을이면 장성을 넘어 침입해 와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과 곡식, 여자들을
공융이 46세가 되던 199년, 조조 제거 시도가 발각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10년 어린 나이에 동탁에 의해 황제가 된 헌제는 어느덧 혈기 왕성한 20대 중반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동탁과 이각-곽사, 조조에게 줄줄이 시달리며 비렁뱅이가 되었었고 꼭두각시 취급받아왔으니 얼마나 속에서 불이 치밀어 올랐을지 짐작하고 남을 일이다. 그런 헌제가 조조를 제거하여 황실을 바로잡으라는 혈서 밀지를 옥대에 숨겨 동귀인의 아버지인 동승에게 내린다. 동승은 뜻을 같이하는 유비, 왕자복, 충집, 오석, 오자단 등을 모아 거사를 논의하려 했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융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서 평천하(平天下)를 노릴 기회를 버리고 황제의 부름에 응하여 6년 전 동탁에 의해 떠났던 중앙정치무대로 복귀한다. 군(君)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신(臣)의 위치로 가서 충의(忠義)의 가치관을 실천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한나라 황제인 헌제는 포로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197년 동탁에 의해 황제가 된 후 이각과 곽사의 난에 의해 성 밖 비렁뱅이가 되었다가 조조의 천하 영웅에 앞서는 명분을 위한 전략으로 구출되어 허도로 이끌려 온 헌제는 얼굴마담이었다. 조조는 스스로 사공의 자리에 올라
공융의 발해국 북해상 시기는 그의 인생 중기에 해당한다. 권력자 동탁에게 밉보인 결과로 맞은 위기로 시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생에서 때로 위기란 기회의 또 다른 얼굴일 때가 많다. 공융이 38살되던 191년, 북해상으로 임지에 온 공융은 초토화된 북해의 백성을 수습한다. 또 군사를 모집하고 곳곳으로 격문을 보내 세력을 집결하는 등 자체 방어 능력을 강화한다. 그 결과 황건적의 식량 약탈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20만 황건적을 다른 지역으로 후퇴시키는 전과를 거둔다. 재차 침입한 황건적 역시 격파해 성읍을 수복한다. 여기에 유가적 덕
아마도 공융은 20세 전후에 관직에 나간 것 같다. 당시 사도(사마, 사공과 함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최고의 관직. 주로 민정 부분을 담당했으며, 실질적으로 승상 대우를 받았음) 양사가 추천해서 사도부 소속 관리로 재직하는 동안 환관과 그 친족들의 비리를 많이 적발해서 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상관인 상서가 환관들의 권력을 두려워해서 결재해 주지 않고 도리어 공융에게 면박을 주었다. 한나라 말 환관의 득세 상황 꼬라지가 훤히 보인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비리를 정연히 진술했다니 공융은 제법 꼬장꼬장하고 타협하지 않는
후계자 경쟁은 이기는 것보다 의사결정자의 기준 충족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경쟁에 이기고도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생겨난다. 즉 의사결정권자의 기준과 의도를 얼마나 잘 파악하고 충족하는가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삼국지를 보면 경쟁의 시작은 조비가 앞서 있었다. 장자 승계의 원칙에서 유리했고, 25살부터 오관 중랑장을 역임하며 경험도 많이 쌓았다. 순욱을 비롯한 많은 대신이 지지했다. 특히 조식의 처가 어른이었던 최염도 조비를 지지했다. 최염이 충고를 하자 조비가 고개를 숙이면서 그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여 사냥을 그만두
208년에 삼공을 폐하고 스스로 승상이 된 조조는 조정의 모든 권력을 움켜쥐고 손권 토벌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5년 후, 신하들이 구석 아부를 한다.구석을 내린다는 것은 황제가 자리를 양위하겠다는 의미를 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대신들이 황제에게 황제의 자리를 조조에게 양위하라는 압박을 한 것이다. 조조에게 황제가 되라는 최고의 아부를 한 셈이다. 그것을 반대하던 순욱은 조조로부터 빈 도시락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순욱이 죽고 1년 후, 조조는 다시 스스로 위공의 자리에 오르고 실질적으로는 황제 이상의 힘을 가진 존재
앞 글에서 조조가 한나라의 사공에서 승상으로 승진한 것을 이야기했다. 나라를 장악한 세력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조조에게는 두 방향의 힘이 가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첫 번째는 기대어 덕을 보려는 집단의 힘이다. 그 집단은 조조에게 왕이 되고 황제가 되라고 부추길 것이다. 조조에게 구석을 내리라고 황제를 압박하는 조정 대신들도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 힘은 조조는 한 왕실을 무너뜨리는 역적이라고 생각하고 제거하려는 경쟁자와 반대파의 힘이다. 원소, 원술, 유표 등 외부의 경쟁자뿐만 아니라 황제를 에워싼 황실 중심주의 신하가 아직도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삼국지와 상상의 허구를 구성한 무협지는 분명히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영웅담, 뛰어난 사람 중심으로 읽으면 무협지에 가까워진다. 역사의 맥락과 흐름, 변화를 함께 살피면서 읽으면 재미 이상의 무엇이 보인다. 양수는 재사로 유명한 사람이다. 보통 자기자랑하다가 성질 고약한 조조에게 걸려서 '계륵'이라는 일화를 남기고 죽은 재수 없는 천재로 많이 기억한다. 만일 그의 재기 발랄함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로 그를 파악한다면 무협지 읽기로 접근한 것이다. 당시 위진남북조라는 시대상황과 권력자 조조의 움직임,
당시 조조가 황제를 모셔서 천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천하 세력의 선두주자는 원소였다. 그리고 경쟁자 유비는 서주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유표는 형주에서 제법 세력을 구축해 안정되어가고 있었다.조조는 조만간 원소와 승부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조조의 앞에는 원소가 있고 뒤에는 유비와 유표가 있는 모양이라 마음이 걸렸다. 원소와 한 판 벌리려니 뒤에 있는 유비와 유표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미리 후환을 제거하고 싶은데, 겨울철이라 군사를 이동하기에 적당하지 않아 난감했다. 그러던 참인데 최근 합
삼국지 속 예형은 뛰어난 재주와 독설로 일약 화제로 떠오른 인물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허도의 실권자 조조에게도 알려졌다. 조조도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한 번 보려고 했을 것이다. 인재에 대한 욕심이 유난히 컸던 조조였으니 그럴만하다. 예형을 불렀다. 그런데 공식적인 발탁의 과정은 아니고 사적인 면접 기회 정도였던 것 같다.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예형이 거절한다. 조조를 역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공식적 발탁이 아니라 사적으로 한번 보자고 하는 것이라서 거절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예형이 거절하면서 내세운 이유
잘생겼다고 다 영화배우로 성공하지 못하며 노래 잘한다고 가수로 대박 나지 않는다. 똑똑하다고 다 출세하지 못하고 실력 있다고 다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살다 보면 깨닫게 된다.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지만 삼국지에는 인물이 넘친다. 그 중 아쉬운 인물을 꼽자면 여포가 있다. 그는 당시 최고의 무사였다. 삼국지연의의 편저자인 나관중이 '신이 전쟁을 위해 특별히 만든 불사신'이라고 묘사했을 정도다.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 탐을 냈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3대 미녀 중 한 사람과 극적인 연애를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삼국지 전체에서 로맨틱 핸
관우의 실패가 성공의 절정기에 일어났다는 것은 매우 교훈적이다. 당시 삼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조조의 위나라는 그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재정 손실이 커져 있고 조직 내의 문제도 산적해 있었다. 손권의 오나라도 지방 토호 세력의 영향으로 응집된 국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대적으로 촉한이 가장 안정되고 유리한 상황이었고, 관우도 과감하게 조조의 영토를 공격해서 큰 전과를 여러 번 올리기도 했다. 국가의 팽창이 시작되던 때였다. 그런데 선봉장인 관우가 무너지면서 교두보인 형주를 잃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촉의 짧은 우위 상황
역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교과서다. 배울 것이 차고 넘친다. 삼국지도 그렇다. 젊을 때는 수호지를 읽지 말고 나이 들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삼국지에는 권력을 향한 갖가지 권모와 술수를 휘두르는 비정한 사람의 모습이 있다. 그런 권모술수를 휘두르는 비정한 사람들을 영웅이라고 보고 그런 것을 짜내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 보는 시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스케일이 크다. 넓은 지역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건의 규모가 거대하다. 영화 적벽대전만 봐도 전투 장면이 엄청나다. 병사가 개미처럼 몰려나오며 엉키고
가장 충실한 참모가 방해물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삼국지 속 조조와 순욱의 관계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뛰어난 참모인 순욱은 자신이 모실 주군으로 조조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순욱은 수많은 대상을 연구하고 비교했을 것이다. 조조의 참모가 되기로 했을 때 순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군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꿈을 이루고 싶어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분명한 한계가 있다. 조직의 방향과 목적,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주군이기 때문이다. 만일 주군의 마음이 달라지거나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참모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삼국지에서 가장 뛰어난 책사는 누구일까? 제갈공명?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제갈공명의 촉나라는 가장 먼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에 비해 위나라는 삼국을 통일해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 그 승리의 기틀을 형성하는데 공헌한 순욱을 최고의 참모요 보조자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그는 활동하기 훨씬 전부터 왕좌지재(王佐至材)라고 소문난 인재였다. 외척과 내시의 세력에 밀려난 호족 세력들은 자신을 청류파, 외척과 내시들을 탁류파라 불렀다. 그리고 천하 제패를 할 만한 인물의 참모가 되려고 찾아다녔다. 원소도 호족 세력의 배경을 가지고 있
고작 25세인데 일련의 유언 형식으로 지시하며 침착하고 지혜롭고 명확하게 국가 대사를 처리하는 손책의 모습은 압권이다. 이 아까운 젊은 영웅도 여러 교훈을 남긴다.첫째, 원수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많은 사람을 이끄는 리더는 난감하고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조직이 크고 일이 중요할수록 대립과 갈등이 많다. 서로 대립하고 상처를 주다가 최악의 경우 원수도 된다. 어쩔 수 없을 때도 있고 감수를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원수 한 명은 친구 열 명보다 힘이 세다. 원수를 안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덜 만들 수는 있다. 방법은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