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천재 삼총사⑯

삼국지 초기 반동탁 연합군인 18로 제후군이 지리멸렬하게 무너지고 난 다음 조조는 능력을 발휘해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었다. 그러던 193년, 조조가 원술과 싸우는 중인데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서주 자사 도겸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도겸은 인근의 도적 떼와 전략적으로 연합하고 있었는데 도적 출신 병사들이 영주와 서주의 경계 지역을 약탈하는 못된 짓을 자주 저지르곤 했던 것이다. 

조조는 원술 격파를 마친 뒤 가을에 대규모 군사로 도겸을 격파하고 10여 개의 성을 점령하는데, 이 과정에서 시체가 강을 메울 정도로 주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비난을 받는다. 한나라 13주 중 하나인 서주 전체를 초토화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만 수십만 명이고 다섯 현의 성읍은 사람 종적이 다시는 없었다고 후한서가 기록할 정도였다. 효를 명분으로 내세운 조조의 복수 행각이었다. 

한나라는 전한 시대에 한 무제가 동중서 등의 폴리페서(polifessor)를 동원해서 유교를 관학화 하여 국가 통치 기반 학문으로 만들었다. 입신양명하려는 자들에게 유교의 가치관은 가장 중요한 배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관제화는 정체와 부작용을 가져오는 것인지, 권력의 전횡과 정치의 부패가 진행되고 유가적 미덕인 청렴함과 효행을 극단적으로 과시하는 원리주의적 풍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과도하게 보여지기 위한 고행으로 효자로 소문이 나고 정치적으로 출세한 사례도 있었다. 유가의 중요한 가치관과 덕목들이 본질에서 벗어나고 위선적 행동과 겉치레로 왜곡되어 만연해진 풍속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본래 의미를 논한다면 실상 부부 사이의 욕정이 나타났을 뿐이 아닌가. 자식이 어머니에게 또한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비유컨대 물건을 병 속에 두었다가 꺼내면 병과 떨어져 상관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는 공융의 말을 효의 개념을 단순히 타산적인 관계의 주고받음으로 이해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효에 대한 공융의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할 당시 공융이 권력자 조조에 대립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 효의 개념이 왜곡되고 타락하여 겉치레 의례로 행해지는 풍속을 개탄하고 있었다. 만일 공융이 이 둘을 묶고 비틀어서 말한 것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공융이 위선적으로 효를 행하는 사람(효도라는 명분으로 서주 학살을 자행한 조조도 포함)들이 말하는 효라는 것이 그렇게 값싼 부모-자식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비웃은 것이 된다.

만일 공융의 발언을 묶어 비튼 것이라고 할 때 효행을 명분으로 내세운 조조의 서주 정벌은 값싼 논리를 바탕으로 저지른 살육 만행이 된다. 반대로 공융의 생각이 틀렸고 조조의 행위가 효의 실행이었다고 한다면 황제가 임명한 서주 자사를 죽인 것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결국 효의 명분으로 불충이 정당화된다. 국가 통치 핵심 덕목의 충돌이다. 이러나저러나 조조에게 이 때문에 생기는 논란 자체가 도움이 안 된다. 게다가 204년 현재 조조는 위 왕 겸 한나라 승상이며 모든 신하와 백성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위치에 있다. 

숨겨진 더 큰 문제는 공융의 논리와 주장을 당시 식자층도 어느 정도 공유하고 공감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게 조조에게 더 큰 부담이다. 당시 사회는 거대 호족과 명문가 세력의 지지와 결집으로 세력이 형성되었다. 만일 이런 여론과 의식이 확장되고 강화되면 조조의 권력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조조 진영에는 인재가 많다. 공융과 같이 건안 7자(建安七子)인 진림도 있으며 조정에서 논쟁을 벌인 순욱을 비롯한 모사들이 있었다. 의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융 한 사람만 제거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강력히 조치해야 한다고 의견이 모여졌을 것이다. 그게 조조의 조직 운영 스타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융의 사회적 기반인 공자의 터전에서 그를 완전히 추방하고 몰락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다. 성직자에게 배교자 또는 이단의 혐의를 씌워서 쫓아내는 식의 극단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구상한다. 그래야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를 사대부 나부랭이들이 다시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 행동대장으로 공융과 사이가 나빴던 치려를 뽑아 어사대부 자리에 앉혔다.

실제로 공융의 조상이며 유교의 뿌리인 공자에 대한 신성 모독이 고발되고 유교의 핵심 덕목인 효를 부정하는 말과 행동이 들춰내어졌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북해상 시절에는 ‘유 씨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 한고조의 절대 불가침의 국가 원칙을 거스른 불충의 죄까지 씌웠다. 이러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실로 치밀하고 악랄하게 공융의 도덕적 존립 가치부터 완전히 말살하는 올가미였다.

조조는 덕이 없어도 능력만 있으면 발탁하겠다는 구현령(求賢令)을 두 번이나 내린 적이 있다. 실제로 인재 욕심이 많았고 적이었던 사람도 무겁게 기용했다. 그러나 반대하거나 비협조적이거나 이용 가치가 없는 인재는 매정하고 잔인하게 대했으며 문관에게 더욱 엄격했다. 조조 시대에 공융이라는 이름은 거명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결국 조조의 인재 포용은 모든 인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복종하고 협조하는 인재였다는 것이다. 아마 2000년이 지난 지금의 권력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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