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화 청년칼럼니스트 
한유화 청년칼럼니스트 

웬일로 이 시골길에 차량 통행이 잦다. 운전해서 지날 때는 그저 배경처럼 스쳐가곤 했던 이산 저산에 성묘를 하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추석 명절인 게 실감 난다. 할머니는 큼지막한 배 한 알을 꺼내 들고 슥슥 껍질을 깎아서 집안의 어른들이 챙겨 온 송편과 전을 담은 다회용 접시 위에 툭툭 썰어 놓으시고. 할아버지와 삼촌들은 산소 주변에 소주를 뿌리며 각각 분주하다. 지난주에 미리 와서 벌초를 하고 갔다는 막내 삼촌은 산소 주변을 정비하기 위해 부지런히 둘러본다. 어느새 과일을 잔뜩 깎아놓은 할머니는 그 야무진 손놀림으로 둥근 봉분 위에 자라난 잡초를 쉴 새 없이 뜯는다.

삼촌들을 따라온 숙모들, 사촌동생들은 되려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 달라붙는 모기를 쫓아내고 주변 풍경을 한 번씩 살피면서 되도록이면 '너무 티 나는 딴짓'을 하지 않으려 애를 쓰기도 한다. 중어중문학과 출신인 나는 묘비에 적힌 한자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낸다. '000파의 몇 대 손'이라는 주요 정보는 봐도 봐도 생경하게 느껴진다. 외할아버지를 이어서 장남 역할을 해야 하는 큰삼촌도 내 옆에서 열심히 묘비를 보며 무언가를 수첩에 기록한다. 

가문의 산소가 모여있는 이곳을 조성하고 정돈하는 것은 이 집안의 대표적인 공동 프로젝트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 가족들이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다. 이 산의 소유자와 장소 사용에 대한 분배를 주도하는 누군가가 따로 있고, 제의식을 관장하는 누군가와, 실제 시공 및 현장관리를 맡는 누군가가 있다. 이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한 '인사(HR) 기획'의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족보'다. 원칙대로라면 어느 집 족보에도 적히지 않는 딸로서, 여자로서의 나. 그 거리감만큼이나 성묘의 시간은 더디게 간다. 

◇집안과 가문 안에서 1인 가구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문득, 한 집안의 장남이 가정을 꾸리지 않은 채 1인 가구로 살고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소화해 내야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장남 대신 차남이, 혹은 딸들이 해당 역할을 맡는 경우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배우자, 자식, 며느리, 사위 등의 전통적인 구성원을 갖춘 가족 형태에 적합한 방식으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3인 이상의 가족으로서 여러 세대를 거쳐 수행하는 장기 프로젝트에서의 역할들을, 지금의 다양한 가족 형태와 시대 상황에 맞게 조정해 나가는 건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가족 안에서 부담스러운 의무를 짊어지는 것의 부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1인 가구인 가족 구성원이 집안의 프로젝트에서 소외되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혼삶은 명절 때 숨 죽이고 있다가, 다른 순간에 다른 영역에서만 집안과 가문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일까? 대를 이어서 역할을 수행할, 소위 '후임'을 양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일까?

서울이 고향인 내 친구들로부터 '선산'을 물려받거나 벌초를 하러 가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 공동 프로젝트의 내용이나 중요성은 천차만별. 집집마다 저마다 다른 가치관과 문화를 지니고,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명절 풍경을 만들어낸다. 다양한 가족 형태가 조금씩 더 안정될수록 우리는 더 창의적인 역할 분배와 대안을 찾아낼 거라고 믿고 싶다. 1인 가구가 많아지면서 무조건적으로 기존의 명절 문화를 축소하거나 소멸시키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면 그 또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 명절 음식을 손수 차리는 남자분을 본 적도 없고 앞장서서 벌초하고 성묘를 나서는 여자분을 본 적도 없지만, 여러 명의 1인 가구가 모여서 이러한 여러 가지 '명절 운영'을 논의하는 것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혈연 가족의 일원으로서 명절마다 본가에 가는 삶을 살고 있다. 그 혈연 가족 안에서 나는 딱히 이렇다 할 담당 업무가 없다. 그것은 1인 가구로서의 '편리함'이기도 하고, 역할 수행원으로서의 기본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에 '기여할 기회가 박탈된 것'이기도 하다. 포지션이 정해지지 않은 후보 선수 같은 상태로 명절에 함께 하고 있기에, 언젠가는 내가 이 경기에 참여하지 않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가끔씩 혈연가족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명절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토록 즐겁고 훈훈한 명절을 함께 하는 동반자들에게 '유사 가족', '대안 가족'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반드시 물리적으로 모여 지내는 명절이 아니더라도, 명절을 명절답게 하는 것들을 소중히 하고 즐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혼삶의 명절 풍경이 보다 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지길 기대해 본다.

[저자 소개] 네이버 블로그 <직장인 띄엄띄엄 세계여행> 운영, 34개국 250여 회 #혼행 전문 여행블로거 

'남의집' 소셜링 모임 <여행블로거의 혼삶가이드>의 호스트

혼삶이 두렵지 않은 합기도 4단, 23년 경력의 '무술인'

현) 비욘드바운더리 글로벌 커머스 본부장

전) 이랜드차이나 상해 주재원, 중국 리테일 런칭 전략기획 

후) 독립출판 레이블 리더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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