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정희정
사진=정희정

 

매주 화요일 필자는 홀로 거주하시는 멜라스(Mélas) 할머님 댁에 들린다. 초기 방문 때만 하더라도 누구인지, 어느 단체에서 왔는지 몇 번을 물어보셨는데 이제는 지난주에 얼핏 나눴던 대화들까지 다 기억하신다.

할머님께서 최근 기억을 잘 못 하신다는 이야기를 미리 전해 들었기 때문에 반복되는 질문에도 항상 처음 들었던 것처럼 답변해드린다. 그런데 가끔 스쳐 지나가며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실 때 보면 할머님께 부족한 부분은 단기 기억력이 아니라 사람의 온정이 아닐까 한다.

할머님댁에 도착하면 손을 씻고 응접실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질문이 쏟아진다. ‘못 본 사이 새로운 소식이 있는지’, ‘그동안 어떻게 뭐 하고 지냈는지’, ‘내 친구들은 잘 지내는지’,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건강한지’, ‘최근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 등 필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주신다.

할머님께서 보기 힘든 바깥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아니라 필자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들은 할머님과 필자의 관계를 봉사활동 그 이상으로 만든다.

여유가 있을 때면 화요일뿐만 아니라 다른 날도 가끔 할머님을 찾아뵙는다. 그 덕에 할머님의 오랜 친구인 고등학생 사라(Sarah)와 파리 외곽과 다른 지역에 거주하시는 할머님 친척들도 만나 뵐 수 있었다.

봉사활동은 기본적으로 한 시간 남짓 어르신들과 시간을 보내면 된다. 하지만 멜라스 할머님과 한 시간으로는 턱도 없다. 여러 질문들은 하시고 난 후에는 세상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조언해 주신다. 올해 94세인 멜라스 할머님은 인생 선배로서 나에게 과분한 분이다.

지난 화요일에 찾아뵈었을 때 할머님께서는 처음으로 ‘피곤하다’고 얘기하셨다. 요즘 일교차가 큰 파리 날씨 탓인지 할머님의 항상 활발했던 표정이 사라져있었다. 그래도 할머님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애완용 새와 함께 시간도 보내면서 지루함을 조금 달래드렸다.

하품하시는 할머님의 모습에 이제 그만 가보겠다고 하자 할머님께서 손님방 저편에 있는 남색 벨벳 모자를 건네주셨다. 요즘 애들에게나 어울리는 모자라면서 자신은 이미 이런 것을 착용할 나이가 지났다고. 할머님의 소중한 물건을 덥석 받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정중히 사양했지만 할머님의 한마디에 그 모자를 집에 데려왔다.

‘나에 대한 추억으로 간직해 달라고.’ 사실 이날, 할머님께서 인형과 모자를 담는 상자를 찾아달라고 하셔서 할머님과 함께 집 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데 할머님께서 심장을 움켜쥐며 힘들다며 숨을 어렵게 쉬셨다. 외출하는 것이 조금 힘들 뿐 정정하다고 생각했던 할머님은 항상 보살핌이 필요한 분이셨다.

할머님의 배웅을 받으며 문을 나섰다. 4층 할머님 댁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길에 할머님의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우리 아가 조심히 잘 가, 다음 주에 보자’ 할머님께서는 내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문을 닫지 않으시고 인사를 해주셨다. 더 자주 찾아뵙고 꽃이 피는 봄에는 할머님과 함께 꼭 데이트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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