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1인 가구가 되는 경로는 다양하다. 청년의 경우 대체로 취업이나 학교 때문에, 중장년의 경우에는 이혼이나 직장 이동, 노인의 경우에는 사별이 주요인이 되곤 한다. 가족과 함께 살다가 학교 혹은 직장 때문에 1인 가구가 되는 청년들이 있다. 안하던 살림도 해야 하고 혼자 살아야 하는 외로움에 힘들 때가 많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가족과 살 때 못해보던 자유로운(?) 연애에 대한 은근한 기대감이 생기기도 한다. 식구들 눈치 안보고 연애 상대를 집에 부를 수도 있고 귀가에 대한 부담 없이 밖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원나잇의 가능성도 커진다.

나름 부담 없는 연애의 길이 열리긴 했지만 남녀 모두 그 길을 선택하기가, 그런데,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개인 간 사귐은 사적(私的)이지만 공적(公的)인 행위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순수하게 사랑만 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랑의 과정에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젠더폭력 구조가 나타나기도 한다. "개인적ㆍ사적인 것은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 혹은 The private is political)."

어두운 골목길에서, 아니, 이제는 조명이 훤한 지하철역에서도 남자의 모습만 보면 가슴이 철렁해지는 여성들이 많아졌다. 여자는 남자에게 당할 수 있는 폭력이 불안하고 남자는 여자가 마음이 돌아섰을 때 덮어씌울 것 같은 젠더폭력 프레임이 두렵다. 사귀다가 돌아섰을 때 남자는 여자와 관계했던 동영상을 유포하거나 심지어 죽인다. 여자는 남자와 나눴던 사랑의 순간을 강간으로 포장한다. 

그렇게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게 나타난다. 여자는 남자가 연애의 목적을 섹스로만 보는 것 같아 한심스럽다. 남자는 여자가 튕기기만 하다가 '단물 쏙 빼 먹고' 자신을 차버릴 지 아닐 지 헷갈려 한다. 남자는 섹드립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자는 성희롱으로 알고 분노한다. 어떤 과정이 사랑의 결실로 가는 것인지, 젠더폭력인지, 섹드립인지, 성희롱ㆍ성추행인지 수많은 청춘남녀에게 혼란스러운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맥락에 따라 충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언론에 몇 줄 보도되고 SNS에 누가 먼저 문제제기하는 과정에서 억울한 피해자, 억울한 가해자가 충분히 생겨날 수 있다. 그야말로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성급한 판단을 유보해야 하지만 우리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우리가 가진 입장과 관점, 그리고 편견에 따라 이미 손가락질의 방향을 정한다. 그러나 이제 그런 분위기가 좀 변했으면 한다. 맥락을 고려한 신중한 판단을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마녀사냥에 휩쓸려서 손가락질을 일단 할 것이 아니라, 마녀사냥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영화 「그날의 분위기(2016년)」에서 수정(문채원)과 재현(유연석)이 나누는 대화를 뽑아서 그대로 써본다.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이 같은 해 5월에 일어났는데 이 영화는 1월에 개봉하였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혐과 남혐의 대립, 젠더갈등에 한국사회가 빠지기 직전에 만든 영화다. 재현이 수정에게 들이대는 과정은 스토킹일까 아닐까? 재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섹드립일까 성희롱일까? 이 영화는 일종의 로맨틱 코메디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그렇게 맺어지면 진짜 로맨틱한 건가? 시간될 때 영화도 보시면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서울에서 부산가는 KTX 안에서 우연히 같은 자리에 앉게 된 두 사람이다. 수정이 마음에 든 재현은 먹을 것을 권하고 목적지를 묻는 등 그야말로 들이댄다.

재현: (한 좌석에 앉은 걸) 대개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죠.

수정: 우연이라고 하죠.

수정이 마시고 싶었던 바나나우유를 재현이 중간 정차역 편의점에 사와서 준다.

수정: 이거 혹시 작업이에요?

재현: 왜요? 그럼 안돼요?

수정: 저 남자친구 있거든요.

재현: 아~~~ 네.

재현이 자는 것 같으니까 수정이 자신 앞에 놓인 바나나우유를 마신다.

재현: 작업이냐고 물어봐 놓고서 마셨다는 건 은근한 오케이다? 아닌가?

수정: 당연히 아니죠! 가져가세요.

재현: 상관없어요. 전 그쪽 마음에 드니까. 특히 요 느낌이!(전화를 받기 위해 수정이 재현 앞을 지나서 나가다가 재현의 무릎에 수정의 엉덩이 부분이 닿은 적이 있었다)

수정이 매우 기막혀 한다.

재현: 저 오늘... 웬만하면 그쪽이랑 자려고요.

수정: 하! 

수정이 무척 당황해 한다. 그런데 영화 배경 음악은 익살스러운 분위기다.

재현: 반했거든요.

수정: 안되겠네요. 진짜 안되겠네요. 

수정이 재현에게 바나나우유를 주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이미 예약되어 있는 자리들이라서 결국 수정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재현에게 말한다.

재현: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하죠.

수정: 좋아요. 그럼 먼저 말하는 사람이 부산에서 밥 쏘기, 오케이?

농구선수 강진철을 만나야 하는 수정은 우연히 재현의 통화를 듣는다. 그리고 재현을 통해 강진철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산까지 재현과 동행을 하게 된다.

재현: 아이~ 누가 사귀재요? 그냥 하루 재밌게 놀자는 건데.

수정: 전요, 잠깐을 놀아도 그쪽같이 가벼운 사람이랑은 안 놀아요... 전 그런 사람 아니라구요.

재현: 바람 못 피워봤죠?

수정: 아, 무슨... 

수정이 한 남자와 연애를 10년 동안 했다는 이야기를 재현이 듣는다.

재현: 아, 연애를 10년 동안 무슨 재미로 하지?

수정: 제가 그쪽이랑 원나잇 할 생각이 없어서 절 굉장히 답답한 여자로 보시는 것 같아요. 저 이래봬도 꽤 개방적인데?

재현: 오케이! 그럼 경험은 있어요? 원나잇?

수정: 아니, 대체 언제부터 한 사람이랑만 자는게 부끄러운 일이 된 거지? 이거 다~ 남자들이 만든 거에요. 이 한심한 여자들아. 그게 얼마나 좋은 건데. 왜들 그러고 있니? 가두지 말고 즐기라고. 안즐기는 건 한심한 짓이라고. 

재현: 그래서 그쪽은 그 한 사람이랑 해서 만족해요?

수정: 그럼 그쪽은요? 그쪽은 그거 한, 한... 

재현: 그거 뭐요?

수정: 호... 혼자...

재현: 아, 좀 크게 좀 말해봐요. 여기 누가 듣는다고~

수정: 아이! 자위하는 것보다 여자랑 하는 게 좋은 이유가 뭔데요? 결국 그쪽도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게 좋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감정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내 말은 아무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 한다는 거에요. 사랑을 해야지, 그게 곧 감정이니까. 

재현: 알았어요, 오케이. 그럼 그게 하룻밤이면 안되는 이유는?

수정: 처음 보는 여자한테 원나잇이니 뭐니... 그런 얘기 막 던지는 거 그거 성희롱이에요! 범죄라고요, 범죄!

두 사람은 부산에 도착해서 "혹시 마음 변해서 나랑 자고 싶어지면 연락해요."라는 재현의 인사말을 끝으로 일단 헤어진다. 영화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고 원나잇을 둘러싸고 밀고 땅기면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메디로 전개된다. 「그날의 분위기」에서 달라질 수 있는 여자와 남자의 연애 이야기를 즐겨 보시길 바란다.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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