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진의 리더십 읽기 -바보 천재삼총사⑩

얼마 전 지인이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에서 올려 본 밤하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후두두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그 별 무리를 보며 호흡이 멎는 황홀함과 신비로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사하라 사막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운 시골이나 바닷가에서 밤하늘을 올려 보면 별이 저리도 많다니, 저리도 가까이 있다니 하고 절로 경탄하게 된다.

철이 들며 깨달은 것은 나보다 못난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읽으면서 세상에 잘난 사람과 뛰어난 사람이 하늘의 별처럼 넘친다는 생각을 했다.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에 대한 글을 읽으면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의 역사는 자기들 필요대로 각색한 것이며 중국의 역사는 승자가 부풀린 무협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분히 비판적인 표현이었으나 역사 기록은 거품을 걷어내며 읽어야 그 속에 숨어 있는 삶의 진정한 모습과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삼국지의 실패한 천재 삼총사’로 내가 생각하는 인물은 예형과 양수, 공융이다. 이들은 최고의 재사인데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셋의 인생 모습은 제각각이다. 과거 민주화 투쟁 시기에 빗대어 생각한다면 예형은 화염병 들고 앞장서다 잡혀간 투사를 생각나게 하고, 양수는 대세를 타고 전향해서 나름 재능을 발휘하며 잘 나가다가 삐끗해서 몰락한 인사가 떠오른다. 그리고 가장 연장자이고 학문과 관료 경력이 탄탄한 공융은 끝까지 자신의 사상과 주장을 견지하고 현실비판을 했던 지조 있는 지식인과 비슷하다.     

사실 공융은 요즘 우리 시대로 본다면 로열 황금 수저 계급 출신이다. 공자의 20대손이며 공자의 고향인 곡부에서 태어났다. 전한 말 한 무제에 의해 유교가 국가의 통치기반 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을 힘입어서 공 씨 가문은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 되어 있었다. 

공융의 일생은 대략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1기는 그가 탄생한 153년부터 관직으로 출사 했다고 예상되는 173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으로, 이 동안 공융은 가문 내에서 전해 내려온 유가의 정신과 가르침으로 훈련됐다. 

2기는 20세부터 38세까지인 173년부터 191년까지 약 18여 년 동안으로, 조정에 출사 한 이후 관료로서의 경험과 훈련의 기간이다. 

3기는 38세부터 44세까지인 191년부터 197년까지 약 6년 동안으로, 발해국 북해상이라는 지방 관료 재직기간이다. 

4기는 44세부터 50세까지인 197년부터 203년까지 약 6년 동안으로, 중앙 관료로 복직하여 한 왕실의 중요 관료 역할에 집중한 기간이다. 

5기는 52세부터 58세까지인 203년부터 209년까지 약 6년 동안으로, 권력자 조조에 대항하다 죽임을 당할 때 까지다.     

공융의 1기에 해당하는 일화 몇 가지가 있다. 주로 그가 성장한 가정의 분위기와 가르침,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행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다. 

형들과 함께 과일을 먹을 때면 언제나 제일 작은 조각을 골라 집었다는 이야기, 열 살 무렵 아버지와 함께 수도인 장안에 와서 청류파의 수장이던 이윤을 방문했을 때의 당돌함과 재기 넘치는 일화들, 열세 살에 부친상을 유교의 규율대로 성심을 다하여 효자로 소문나게 된 이야기들을 통해 매우 충실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자란 가정은 공자라는 위대한 조상을 정점으로 둔 ‘가문’이다. 정신적-사회적 기초 위에 세워져서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으로 유교의 정신과 내용을 전승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융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하고 그대로 살아야겠다는 신념을 형성하고 사는 동안의 판단과 실행의 기준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16살에 있었던 ‘피의자 장검 은닉 사건’을 보면 가정교육의 증거를 엿볼 수 있다.     

공융이 16살이던 169년, 공융의 형 공포의 친구 장검이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십상시의 한 명에게 저항하다 도피해 온 일이 있었다. 당시 집에는 공융 혼자 있을 때였는데 공융은 장검이 형을 찾아온 손님이라고 판단하여 받아들이고 숨겨준다. 아마도 십상시의 불의함에 대한 인식과 판단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숨겨준 것이 발각되고 관아에 체포되었는데, 공융은 자신이 숨겨주었으니 자기가 책임지고 처벌받겠다고 하고 형 공포는 자기를 찾아왔으니 자기 책임이라고 나선다. 또 공융의 어머니는 집안의 어른인 자신의 책임이라고 나서서 더 판단이 어려워진 지방 관아는 결국 중앙의 판단을 물어 처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식구 모두 자기 책임이라고 나섰다니 가족이 화합하고 하나의 정신으로 강하게 뭉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13세에 부친상을 유교적 예법에 충실하게 치러 효자로 알려진 공융은 이 일로 다시 의로운 사람으로 알려진다. 공융은 청류파 사대부들에게 효와 의의 재사라고 널리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공융의 삶 1기를 살펴보면서 가정교육의 중요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의 출발점을 형성하고 방향을 정하며 가치와 판단의 기준을 세우기 때문이다. 만일 공융의 가슴속에 공자라는 위대한 조상과 그것을 탄탄히 전하고 가르친 가문과 가정, 그것들을 통해 형성된 ‘나는 공자의 후손이다’라는 정체성과 의식이 없었다면 삶 전체를 통해 유가의 가치와 교훈을 실천하려 애쓴 공융이라는 인물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 할아버지는, 내 조상은 누구인가. 내 가정 내 가족은 가족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가르치고 있을까. 갈수록 가문과 가정의 개념이 희미해지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과 의식이 혼란스러운데 점점 바빠지기만 하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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