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진의 리더십 읽기 -바보천재 삼총사⑩

아마도 공융은 20세 전후에 관직에 나간 것 같다. 당시 사도(사마, 사공과 함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최고의 관직. 주로 민정 부분을 담당했으며, 실질적으로 승상 대우를 받았음) 양사가 추천해서 사도부 소속 관리로 재직하는 동안 환관과 그 친족들의 비리를 많이 적발해서 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상관인 상서가 환관들의 권력을 두려워해서 결재해 주지 않고 도리어 공융에게 면박을 주었다. 한나라 말 환관의 득세 상황 꼬라지가 훤히 보인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비리를 정연히 진술했다니 공융은 제법 꼬장꼬장하고 타협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나보다.   

공융이 31세인 184년, 황후가 된 여동생의 후광으로 초고속 승진해서 대장군이 되어 권력을 잡은 백정 출신 하진과의 일화도 있다. 대장군은 사도보다 높은 직급이다. 그래서였는지 사도 양사가 공융을 하진에게 보내어 축하 인사를 전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진이 공융을 만나주지 않고 되돌려 보낸다. 빈손으로 돌아온 공융은 꼭지가 돌았던지 하진의 무례와 법도에 어긋남, 그리고 권력자가 되어 행하는 불의함 등 하진의 잘못을 탄핵하고는 관직을 집어던지고 낙향해 버린다.

공융의 탄핵으로 상당히 쪽이 팔렸던 걸까. 부하들이 자객을 보내 죽여버리자고 주장했고 하진도 그러려고 했던 듯하다. 그런데 조금 생각 있는 문객 하나가 “지금 공융은 세상에서 이름이 높아 그의 원한을 사는 일을 한다면 사방의 사대부들이 그를 따라 물러날 것이다. 차라리 예를 갖추어 그를 다시 불러들여서 장군의 넓은 마음을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좋다”라고 충고한다.

하진은 팔랑귀였는지 그 말에 생각을 바꿔서 공융 꼬시기로 작전을 바꿨다. 그리고 공융을 시어사(어사대부(요즘 검찰총장)의 부관인 어사중승(대검 차장) 휘하 감찰직으로 추천한다. 그러나 어사 중승인 조사와 영 케미가 안 맞았았던 공융은 몸이 아프다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버린다. 그리고 나중에 사공부의 복귀 명령에 의해 중후군에 임명되었다가 3일 만에 호분 중랑장(황제의 호위와 경비를 맡은 광록훈 소속의 무관. 근위 여단장쯤 되는 직책)으로 급 승진한다.      

이를 보면 아마 공융은 관리 시절 초부터 바른생활 관료가 되기로 작정하고 노력한 것 같다. 어릴 때 가정교육으로 다듬어진 세계관과 가치관, 국가관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장장 18년 동안 공융은 제법 인정도 받아서 능력과 통찰력, 그리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됐다. 

황제를 둘러싼 환관 세력(탁류)과 타협하지 않는 업무 수행은 당시 청류파 사대부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추앙을 받았고 권력자 하진도 그것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 추앙과 지지는 단순히 그의 올곧은 관직 수행뿐만 아니라 그가 탁류파 세력과 대립하던 청류파의 일원이었다는 점, 또 공자의 20대손이라는 출신 배경의 상징성 등도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공융이 36세가 되는 189년, 하진은 십상시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죽음을 맞고 외부 세력이던 동탁이 낙양으로 진입하면서 새로운 회오리가 몰아친다. 동탁은 황제인 소제를 구출하고 낙양에 진입하여 권력을 잡는다. 그리고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세우고 스스로 상국의 자리에 앉아 권력을 공고하게 구축한다. 전권을 잡고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권력 기구까지 임의로 설치해서 기존의 황실 중심 권력 체계를 해체하고 무력화한다.

이 시점에서 공융과 조조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대조적인 방법을 보게 된다. 동탁이 한 나라를 위협하는 불의한 존재라는 점에는 공융과 조조의 생각은 같다. 그런데 무관인 조조는 자신의 편이 되라는 동탁의 제의를 거절하고 도망친다. 그 후 자력으로 군사를 모아 동탁 타도의 기치를 내건 18로 제후군에 합류해 힘으로 맞서는 길을 선택한다. 

반면 문신인 공융은 조정에 그대로 남아 직언과 논리적 공박으로 전횡을 막고 바로잡으려 한다. 그러나 난세에 붓의 힘은 칼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사대부의 존경과 지지를 엄청나게 받는 공융이라 할지라도 체제와 권력을 장악한 동탁에게는 고리타분한 말장난으로 성가시게 하는 존재였다. 그래도 주변 눈치를 조금은 봤던 것인지 동탁은 공융을 의랑으로 좌천시킨다.

다음 해인 37세가 되던 190년. 18로 제후군이 동탁을 제거하려고 낙양을 공격지만 실패한다. 그런데 동탁은 이 일을 핑계로 낙양이 기운을 다했으니 장안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나선다. 그러면서 낙양에 있던 원소의 일족 80여 명을 몰살해 버린다.

사실 수도 이전은 세력 근거가 약한 동탁의 묘수였다. 낙양은 기존 중신들의 세력 근거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가문끼리 혼인하고 이익을 공유하면서 그 기반을 더욱 단단하게 해 놓은 곳이다. 수도를 옮기게 되면 그 권력 기반이 상당 부분 사라지게 된다. 거기다가 동탁은 화폐개혁까지 단행한다. 숨어 있는 경제를 들춰서 신하들의 경제적 기반까지 해체하려 한 것이다. 엄청난 무리로 보였지만 동탁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한 절대적인 묘수였기 때문에 매우 강력하게 추진했다. 

아마 공융은 동탁에게도 변함없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계속 바른 소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였을까. 이듬해 공융이 38살이 되던 191년, 동탁은 공융을 발해국 북해상이라는 지방 관리의 자리로 좌천 발령한다. 두어 해 전부터 황건적이 다시 발호하기 시작했고 그중 발해국에 자리 잡은 세력이 가장 성했다는데 그런 곳으로 공융을 보낸다는 것은 가서 죽으라는 말과 뭐가 다를까. 동탁의 인사 조처는 단순한 좌천이 아니라 차도살인, 즉 남의 칼로 제거하려는 속셈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저작권자 © 1코노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