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진의 리더십 읽기 -바보 천재 삼총사⑫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융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서 평천하(平天下)를 노릴 기회를 버리고 황제의 부름에 응하여 6년 전 동탁에 의해 떠났던 중앙정치무대로 복귀한다. 군(君)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신(臣)의 위치로 가서 충의(忠義)의 가치관을 실천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한나라 황제인 헌제는 포로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197년 동탁에 의해 황제가 된 후 이각과 곽사의 난에 의해 성 밖 비렁뱅이가 되었다가 조조의 천하 영웅에 앞서는 명분을 위한 전략으로 구출되어 허도로 이끌려 온 헌제는 얼굴마담이었다. 조조는 스스로 사공의 자리에 올라 조정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거처에 권력 통제 기구를 설치하여 나라 전체를 휘둘렀다. 그리고 인재를 영입하려는 노력도 눈에 띈다. 여포에게 근거지를 빼앗긴 유비를 받아주고 수하에 두려고 노력한 일도 이 시기의 일이다. 조조는 향후 자신의 야망인 천하 통일을 위해 더 많은 인재를 모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권력이 세지면 세진 만큼 저항도 커진다. 아직도 황제와 한나라의 체제는 엄연히 살아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존속했던 나라인 만큼 체제와 정신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으며,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기 마련이다. 그런 세력이 조조에 저항한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예형의 “나체 드럼 연주”와 조조 측근에 대한 독설 사건이다. 그 예형을 추천한 사람이 공융이었다는 점, 그리고 조조가 예형을 직접 죽이지 않고 형주의 유표에게 보내어 차도살인을 시도한 점 또한 눈여겨 볼일이다. 

당시 천하는 군웅들의 할거 상태였다. 그중에 원소와 원술 형제, 형주의 유표가 두드러졌다. 조조는 원소를 최대 라이벌로 생각했다. 지리적으로 원소는 조조의 북쪽에 있고 원술과 유표는 조조의 남쪽에 있다. 원소와 대적할 때 유표가 원소 원술과 연합하면 후방이 위험해진다. 더구나 형주는 위-촉-오 어느 지역으로 가든 오든 반드시 지나게 통로이며 전략적 요충지다. 천하를 통일하자면 반드시 차지해야 할 곳이다.

그래서 조조는 천하통일을 위한 전략적 판단으로 형주 정벌을 준비한 것 같다. 잽을 한 방 날리는 기분으로 말 많고 귀찮은 선비 예형을 유표에게 보내어 약을 올려본다. 그리고 형주에서 예형이 죽자 조조는 198년에 군사를 이끌고 형주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유표가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44세인 197년 헌제에게 부름 받은 공융은 장작대장(토목과 능묘 사업 담당)에 천거되었다가 소부(9경 중 하나. 궁중의 재무를 담당)로 전임되어 조정의 핵심에 자리한다. 장작대장 시절(조조의 헌제 옹립 허도 천도 직후로, 조조의 조정 내 지위가 아직 완전히 자리잡기 전으로 보임)에는 대장군 직을 두고 조조와 원소가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조조가 세력이 더 큰 원소에게 양보를 하였고, 공융은 원소에게 대장군직을 수여하는 칙사로 파견되어 상황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했다.

그 후 조조는 계속 조정 내 권력을 계속 넓혔으나 공융은 결코 복종하지 않았고, 조회를 열 때마다 늘 정론을 펼쳐 의견을 주도하여 대신들이 그의 의견을 인정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즉 공융은 한나라의 주요 대신으로써 한 왕실의 편에서 조조를 견제하며 국가 운영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거중 역할을 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권력의 냄새를 따라 레밍 쥐처럼 몰려가는 것이 세상인심이라 아마 공융은 참 외로웠을 것이다. 이미 판도가 기운 상황에서도 공융이 노력했던 흔적이 엿보이는 일화가 몇 있다.   

그 하나. 태부 마일재가 황제의 사신으로 전국을 돌면서 황명을 전하는 과정에서 수춘의 원술에게 갔다가 부절을 빼앗기고 심한 모욕까지 당해 화가 나 죽고 말았다. 그런 마일재의 시신이 허도로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황실의 명예까지 실추한 마일재의 장례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원술을 라이벌로 여기던 조조 측이 강하게 주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공융은 마일재의 장례에 특별한 예를 더하지 않는 것으로 태위 직위 강등에 해당하는 조치를 하자고 중재하고 강경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설득해 마무리한다.

또 다른 일. 양수의 아버지인 태위 양표의 일이다. 양표의 아내는 원술의 누이동생이었는데, 그 무렵 원술이 칭제를 하려고 했다. 한나라의 입장으론 최고의 반역 행위다. 평소 양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조가 이를 근거로 양표를 죽이려 하자 공융은 서둘러 조조에게 달려갔다. 조조는 양표를 죽이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일이라며 고집했다. 그러자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죽이면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지 않게 될 것이다"라며 설득, 양표를 구해낸다. 

이 일화들을 보면 공융은 조조의 신하가 아니라 한나라의 신하라는 강한 포지셔닝 의식을 바탕으로 중신의 역할을 하려 했던 면모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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