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진 나음연구소 소장
강한진 나음연구소 소장

옛날 어느 곳에 할머니와 아들 부부, 손자가 살았다. 가난이 죄라고, 당시에는 사람이 병이 들거나 늙으면 산 채로 땅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더는 어쩔 수 없게 된 아들은 지게 위에 할머니와, 할머니가 당분간 먹을 음식을 지고, 가시덤불과 나무가 무성한 숲을 헤치며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할머니 손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들이 “어머니, 손에서 왜 이렇게 피가 납니까?”하고 묻자, 어머니는 “네가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릴까 봐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을 꺾어 놨다. 그것을 따라 돌아가거라”하고 말했다. 

아들은 울면서 집에 돌아와서 부인에게 그 얘기를 했고, 부인도 함께 울면서 할머니를 학대했던 지난 일을 후회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제주도의 고려장 설화 일부분이다. 다른 전승들과는 조금 다른,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을 꺾어 돌아갈 길을 표시한 어머니를 다시 모셔오지 않는 대목이 눈을 끈다. 

얼마 전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신 뒤로 계속 가슴을 누르는 생각 때문에 더 마음이 기우는 것일까. '그대,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최근 지인이 오래 모셔온 노모와 요양원에서 사실상 이별을 했다며 숯 같은 마음을 털어놓았다. 알아보지 못하시는 어머니, 탈진한 자식들, 숨만 붙은 어머니를 안으며 '왜 빨리 돌아가시지 않느냐'고 흐느끼는 서글픈 마음. 장병에 효자는 진정 불가능한 것일까. 

며칠 전 어머니가 코로나19 양성이라 독방으로 격리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막힌 벽과 닫힌 문, 손바닥만 한 창, 대화 없이 종일 가라앉을 시간들. 면회도 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 무거운 침묵과 고독을 어찌 견디실까. 

벌써 서너 달. 어머니가 당신 발로 요양원으로 가실 때 외로운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돌아가시게 하는 듯했다. 4명의 자식들은 비행기를 타야 모일 수 있고, 살기에 바빠 모시기도 쉽지 않은지라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얼마간 불쑥불쑥 가슴이 막히다가 슬그머니 편해지더니 무덤덤하다. 그게 더 죄스럽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은 100대 0.7이라는 미국 어느 대학의 연구, 제 새끼는 100번 생각하는 동안  부모는 1번도 생각 안 하는 게 사람이라던 김희재 수필가의 글이 가슴을 찌른다. 그래서일까, 밤 낮 뜬금없이 울리는 어머니의 전화벨이 감사하기만 하다.

숨넘어갈 만큼 열심히 노력해 온 우리, 과연 더 잘 살게 된 것일까. 더 잘 사는 판단의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 부모들은 대부분 부모 임종을 집에서 맞았다. 넘치는 눈물과 펄럭이는 만장으로 애도하며 배웅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은 노부모를 모시기에 거의 불가능해져 있고, 돌아가신 후의 처리는 상당히 표준화되고 자동화됐다. 잘 살게 된 결과인가. 많이 가지고 편리해진 삶을 누리느라 치르는 대가일까.

사람에게 죽음은 가장 두려운 것. 그것을 혼자 맞는, 고립감과 무력감, 무거운 적막 속에서 맞아야 하는 심정을 이해할 자신은 없다. 바닥 없는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 죽음을 설계하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 무서운 죽음을 설계한다니, 오죽하면 그럴까. 자신의 의미와 가치, 존재의 존귀함을 지키면서 삶을 마감하려는 몸부림일까 하는 자신의 죽음을 최소한이라도 존중받으며 귀하게 지키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이 사회와 가족은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마련해 주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도 엿보인다.

내가 맞고 싶은 죽음의 모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맞고 싶은 죽음의 모습을 생각하는 만큼 맞고 싶지 않은 죽음의 모습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맞고 싶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외로운 죽음, '고독사'일 듯하다.

고독사, 외롭게 죽어감. 외면되거나 소외되고 단절되어 사회 속 자신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무가치함과 무의미함 속으로 끝없이 함몰되다가 생을 마감하는 안쓰러운 모습이 깔려 있어 참으로 슬픈 단어다. 

IMF 이후 엄혹해진 경제적 상황과 COVID-19의 창궐로 인한 사회경제적 여건 악화, 사회 안전망 약화로 예전에 50대 이상이 중심이던 우리나라의 고독사도 갈수록 모든 세대, 모든 나이로 확대되어간다니 더 슬프다. 

실제로 고독사로 추정되는 무연고 사망자는 지난해만 3488명에 달한다. 2012년 1025명에서 3배 이상 급증했다. 

소리 없는 고독사의 숫자가 요란한 바이러스 창궐보다 심각한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 보인다. 65세 이상 1인 가구 수는 166만명, 고령자 중 5명 중 1명꼴이라니, 우리 사회는 매우 위험스러워 보인다. 노인계층의 고독사는 어머니를 떠올리고 나의 불효의 증거처럼 다가온다.

상당히 늘어난 청년들의 고독사도 아픔이다. 못난 기성세대가 그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절망하게 했다니, 내 살기에 바쁘다며 시선 두지 못한 어느 구석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다니, 무저갱으로 가라앉은 그들의 삶이 가슴을 저린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들을 덮쳤을 참척의 고통(慘慽之痛)이 무참하다.

고독사 예방을 위한 법령 시행 후 1년, 그 어렵게 디딘 한 발이 참으로 칭찬할 만하나 뒤를 잇는 걸음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 그간의 정치, 경제, 사회적 요동과 어려움을 참작하면 이해는 된다. 그럴지라도 사람의 목숨만큼 귀하고 급한 문제가 어디 있을까. 이제는 천 리 길도 한 걸음이라는 자위(自慰)에서 벗어나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의 마음으로 분발하고 널리 알려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일으켜주었으면 한다. 여러 제도, 방법, 프로세스 등이 필요할 것이고, 병행해서 많은 대화와 관심, 합의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느새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워진 나이가 되어 있다. 자신의 죽음을 혼자 준비하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으며, 이미 개인의 죽음은 모든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이유가 너무도 분명해진 세상이 되어 있다. 책임을 함께 지는 그 첫걸음은 관심을 두고 살펴보는 일일 듯하다.

▶필자는 마음을 연구하는 곳 나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통이 필요한 분은 언제든 메일(hjkangmg@hanmail.net)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소개]

나음 강한진 소장은 경북대학교 공대에서 전자공학을,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과 상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국내 기업에서 엔지니어와 관리자 경험을 쌓고 지금은 나음연구소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대인관계와 소통, 특히 갈등을 긍정적인 계기와 에너지로 전환하는 지혜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가정과 학교, 청년에게 있다고 믿으며, 가족의 평화와 학교(교사-학생-학부모)의 행복, 청년의 활력을 키우기 위한 일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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