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의 일이다. 한참 추수 중에 '후다닥!' 소리가 나더니 고라니가 튀어나왔다. 새끼로 보이는 작은 녀석도 이삭 사이에서 나왔다. 콤바인 기계가 멈추어 서고 논둑의 농부 둘이 황급히 뛰어 들어갔다. 어미는 허둥대며 콤바인 쪽으로 덤벼들려다가 농부가 가로막자 몸을 돌려 논둑 넘어 개천 수풀로 몸을 던졌다. 새끼도 뒤따라 사라졌다.여기는 '구만리 들'의 남쪽 한 귀퉁이다. 위쪽에 야트막한 산, 아래쪽엔 4차선 산업도로, 좌우엔 2차선 지방도로가 둘러싸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2년 전에 허리께에 새 포장도로가 놓
문화강좌 신청 방법과 절차가 달라졌다며, 홈페이지에서 직접 신청하라는 공지가 떴다. 담당자가 때맞춰 잘 알렸으나 쉽지 않았다. 나만 아니었다. ‘강좌를 열 번 넘게 쳤으나 없다’, ‘어떻게 하느냐’고 여러 사람이 물었다. 어느 분이 접속 링크를 만들어 대화창에 올렸으나 이번에는 수강료를 먼저 입금했는데 등록이 되었느냐는 문의가 이어졌다. 담당자의 수고와 번거로움, ‘절차가 어렵게 개악되었다’라는 불만을 지켜보며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최근 고속도로 휴게소가 크게 달라지는데, 그중 하나가 음식을 주문하는 방법이다. 어느 날 음식 주
제4유형 – 힘들게 하고,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사실 이 유형의 사람이 직장생활 어려움의 대부분을 안겨준다. 이 유형에는 참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있다.첫째, 자기 말만 하고 나를 무시하거나 가르치려 하는 사람이다. 자기만 옳다고 하거나, 자기가 더 잘 안다고 우긴다. 가끔은 내 영역까지 넘어와서 이것저것 간섭하고 바로잡으려고도 한다. 그리고 제 할 말 다 하면 가 버린다. 그의 잘난 척 보다 내 말의 기회를 잃은 것에 더 화가 난다.둘째, 일을 떠넘기는 얌체다. 함께 일을 해야 하는데 자기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니 먼
옛날 어느 곳에 할머니와 아들 부부, 손자가 살았다. 가난이 죄라고, 당시에는 사람이 병이 들거나 늙으면 산 채로 땅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더는 어쩔 수 없게 된 아들은 지게 위에 할머니와, 할머니가 당분간 먹을 음식을 지고, 가시덤불과 나무가 무성한 숲을 헤치며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할머니 손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들이 “어머니, 손에서 왜 이렇게 피가 납니까?”하고 묻자, 어머니는 “네가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릴까 봐 나뭇가지와 가시덤불
오랜만에 딸이 전화했다. 떨어져 사는 장성한 자식의 전화는 신호다. 좋은 일이 있거나 안 좋은 일이 있거나. 경험에 의하면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은 3대 7 정도, 안 좋은 일일 경우가 훨씬 많다. 그것도 잘 쳐서 그렇다. 이해한다. 나도 젊었을 때, 아니 나이 든 지금도 그렇다. 좋은 일 기쁜 일이 있을 때는 마음이 뜨거워 가까이 있는 사람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멀리 있는 부모 형제는 훨씬 후 순위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안 좋은 일이 있거나 기분이 가라앉을 때는 조금 다르다. 차분히 가라앉고 혼자 있고 싶어 지
금요일이면 손자들을 만나러 가기 위한 쇼핑을 한다. 아들네와 한 시간 거리에 떨어져 사는 우리는 격주로 손자들을 만난다. 녀석들은 만나자마자 내게 범인, 악당, 상어를 시킨다. 저들은 경찰, 정의의 우주 전사, 용감한 선원이다. 그리고 나를 쫓는다. 그렇게 부대끼고 뒹굴며 생기는 것, 그것이 핏줄의 느낌일까. 아들을 키울 때는 사실 크게 느끼지 못한 것이다. 삶이 바빠서? 조금 나이가 들고 바쁨과 치열함을 내려놓아 느낀다니, 새삼스럽다.한 달쯤 전, ‘깨똑!’ 소리와 함께 아들의 메시지가 왔다. 전화기를 속에는 손자 녀석이 뿌듯한
아차 하며 달려가 불을 껐으나 이미 늦었다. 탄 냄새와 연기가 집안에 가득하다. 냄비 속은 시커먼 숱이 됐다. 간단히 요기할 요량으로 냄비를 불에 올려놓고 잠시 딴짓하다가 벌어진 소동이다.갑자기 화가 난다. 요즘 들어 이런 일이 잦아져서다. 아내가 가끔 그러더니 나도 점점 그런다. 앞뒤 창문을 한참 열어 두어도 냄새는 쉽게 빠지지 않는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아내의 짜증. 아끼는 냄비만 골라 태워 먹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게 태운 냄비의 뒤처리는 모두 내 몫이다. 아내는 손목이 매우 약하다. 골격이 약한 데다가 산후조리도 제대
매해 4월 어머니는 마농지를 담그셨다. 우녕밭 마늘이 한참 줄기를 세워 푸른 키를 높이고, 땅속 뿌리 마늘 아직 덜 알이 찼을 때, 어머니는 손가락 마디만큼 마늘대를 자르고 항아리에 넣어 끓인 간장을 붓고 돌멩이를 얹으셨다. 그리고 오뉴월 볕 아래 장독대에서 익은 마농지는 한여름 이후 밥상에 항상 자리했다.어머니가 대나무 엮은 차롱에 보리밥을 싸고 자리젓과 된장, 콥데사니 마늘을 챙겨서 돌 많고 척박한 보리밭으로 갈 때 진드기처럼 따라붙는 나의 반찬은 마농지였다. 누나와 형이 연한 콩잎 위에 보리밥과 자리젓, 된장을 얹으면 나는 마
지난번 글을 올리고 두어 시간쯤 지났을 무렵, 딸의 전화가 왔다. 글을 봤다면서 다짜고짜 "아빠, 내가 예전 회사에 다닐 때 회식하다가 전화했던 거 기억나?"라고 직격했다. 녀석이 전화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친구와 수다하다가 갑자기 영상 통화를 걸어와서 내의 차림이던 나를 당황하게 한 적도 여러 번인데 기억이 날 리 없지. "글쎄~"라고 했더니 채근하듯 이야기를 꺼냈다."내가 전에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거의 마음 먹은 무렵이었어요. 하루는 회식하자고 하더라고요. 당시 '미투'가 한창일 때였는데 C부장이 술 좀 취하더니 난데없이
나의 요즘 관심사는 젊은 세대다. 그들이 궁금하고 그들의 감각과 에너지가 부럽다. 얼마 전 딸에게 도움 되는 글을 써 볼까 얘기했더니 반색을 했다. 이왕이면 연애 매뉴얼을 써 달란다. 녀석의 요즘 관심사다. 괜찮겠다 싶다가 바로 꽝! 절벽에 부딪힌 기분이 되었다. 우선 내가 연애를 잘하거나 많이 한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 꼰대의 사랑법과 MZ세대의 사랑법은 매우 다를 것 같았다. 어찌어찌 쓴다 해도 내 얘기만 잔뜩 하면 완전 노답, 꼰대 짓이다. MZ세대가 초점이어야 하는데 나는 MZ세대를 잘 모른다. 그래서 아는 청년에게 도움을
여러 해 전 일이다. 일곱 살인 첫 손자의 돌이 가까운 어느 날 늦은 밤 아들이 전화를 걸었다. “아빠, 우리 키울 때 많이 다투셨어요?” 풀 죽은 아들의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질문에 대충 대답하고 위로하려 했는데 집에 다 왔다며 전화를 끊었다. 며느리하고 한바탕했구나. 걱정되었다. 누구 전화냐고 아내가 물었으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다음 날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잊고 있었다.그러다가 며칠 전 아들과 대화하다가 불쑥 물어봤다. 수년 전 밤중에 전화했던 것 기억하느냐고. 아들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어느 날 운전 중 전화가 왔다. "무서워 죽겠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평소 상담을 청해오던 내담자다. 근무 중 숨어서 전화를 걸었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핸즈프리를 넘어 필자에게도 느껴질 정도로 심하게 떨렸다. 위급함이 느껴지는 상황에 통화를 이어가고자 필자는 급히 차를 세워, 이야기를 들었다.발단은 이랬다. 최근 학교폭력 사건을 일으킨 중학교 2학년인 딸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핸드폰만 만지며 빈둥거리다가 남편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말다툼이 벌어졌고 화가 폭발한 남편은 딸의 머리채를 잡고 휘두르며 폭력을 가했다. 도망쳐
연애하면 생각이 많아진다. 그리고 조금 엉뚱해지기도 한다. 황당한 생각을 하고 어이없는 행동도 한다. 딸이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냐고 내게 물은 지 한 달쯤 지났을까, 딸이 또 물었다.“아빠, 어떤 여자가 매력 있어?”또 돌직구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남자친구와 좀 가까워지긴 했는데 처음과 달리 관심이 적어진 것인지 덜 다이내믹하고 심심해졌다고 말했다. 또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내가 덜 매력적이라서 처음에 보였던 관심이나 열정이 사라졌나 자꾸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가만 보니 딸은 자기가 매력이 없는 건 아닌지, 어떻게 하면
연애한다는 딸이 주말인데도 나가지 않고 집에 있다. 밖으로만 돌고 오리무중이 되어서 저녁만 되면 내 눈이 벽시계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던 녀석이, 방구석에 있다. 애인이 생겼다는 녀석이, 2주째 데이트를 안 하다니, 분명 이상 징조다. 걱정되는 마음에 데이트 없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한다. 그냥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잠시 떨어져 있자고 했단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더니 짧은 대답이 돌아온다. "그냥 좀 피곤해서"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유추해 보니 며칠 전, 사람 관계가 왜 이리 전쟁 같으냐던 녀석의 푸념이 떠올랐다. 녀석은 요즘
사귀는 사람이 생겼다는 딸에게 개구리와 전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교훈을 가장해 잔소리한 적이 있다. 처음부터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하고 싶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딸은 생각을 참 많이 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앉아 있는데 딸이 다가와서 조용히 물었다.“아빠, 근데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야?” 순간, 명치를 맞은 듯 당황스러웠다. 우선 내가 좋은 남자인지 덜컥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혈기 방자한 젊은 시절에는 나보다 잘난 놈 있으면 나와보라며 오만을 떤 적도 있지만 나이 들면서 그런 기백은 경륜이란 이
지인이 인터넷에 인터뷰 동영상을 올렸다. 그가 예전에 절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는 동영상이었다.하루는 스님을 모시고 동네 노래방에 갔다. 노래를 좋아하는 스님은 마이크를 잡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셨다. 그런데 문제는 음정과 박자가 엉망인 것. 서너 곡을 계속 부른 뒤에 지인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지인이 노래를 마치자 스님이 다시 마이크를 받아서 박자와 음정이 사라진 노래를 계속 부르셨다. 연세 높으신 스님이 즐거워하시는데 어쩌겠는가. 그날 노래방 나들이는 그렇게 마치고 돌아왔다. 며칠 후 스님과 차를 마시다가 노래방 갔던
딸의 전화기가 꺼져 있다. 지금 마음이 힘들거나 지쳐 있다는 신호다. 윗사람이 섭섭하고 실망스럽다며 대화해 볼 것이라고 하던데 잘 풀리지 않았나 보다.딸은 스타트업에서 근무한다. 스타트업은 작아서 성공한다. 성공하고 성장하면서 기능과 역할이 나뉘고 절차와 시스템이 갖춰진다. 외부와의 교류도 넓히고 더 많은 정보와 조언과 제안들이 리더에게 들어온다. 사실 그것들은 리더가 매우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리더가 내부보다 외부의 말에 귀를 더 기울이고 외부 사람을 더 믿으면서 문제가 생긴다. 딸의 하소연은 다음 이야기와 비슷했다.사업
나만 느끼는 것일까, 뉴스가 무서워졌다. 험한 이야기가 갈수록 많아진다. 아이를 학대한 부모, 데이트 폭력, 혐오폭력, 보복 운전, 묻지마 폭행, 가스라이팅, 심지어 일가족을 스토킹해서 살해한 사건까지. 어쩌다 폭력이 이렇게 창궐해졌을까. 뉴스를 안 보겠다고 결심해 보지만 얼마 안 되어 나도 모르게 리모컨을 누른다. 많은 사람이 나름의 원인과 해석, 대책을 이야기하나 썩 흡족하지 않다. 나는 잠시 혼자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올해 58살인 여동생의 손등에는 여섯 살에 생긴 상처 자국 두 개가 있다. 8살 무렵, 부모님이 밭일을
자식이 주는 기쁨과 아픔의 총량은 같다고 한다. 즐거운 만큼 힘들기도 하다는 말이다. 많은 부모가 자녀의 대학 진학을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데, 우리 아이는 별 어려움 없이 제가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 주어서 고마웠다. 입학하는 날 나는 대학 생활 동안의 목표를 세워보라면서, 한 번은 올 에이(A)를 받는 것, 인생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일을 찾는 것, 진실한 사랑을 해 보는 것을 권했다. 딸은 그 모두를 욕심냈던 것 같다. 힘들다는 올 에이플러스(A+) 성적을 받았고 인생 진로의 방향을 정하고 체계적으로 준비도 했다. 어느 날은 남자
띨롱~. 정확히 아침 6시 30분. 일주일에 두세 번. 몇 년째 친구가 보내주는 메시지 수신음이다. 마음을 끄는 글을 담담히 타이핑하고 음악을 넣었다. 그는 그냥 보내고 나도 그냥 받는다. 잘 받았다고 답장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어느덧 그 메시지는 바빠지려 할 때 나를 잠시 늦추고 생각을 심호흡시킨다. 메시지가 없는 날은 뭔가 빠진 기분일 때도 많다.그 친구는 중학교 2학년 때 만났다. 검은 교복에 까까머리 까만 얼굴, 웃을 때 하얀 이가 빛났다.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다닐 때 그는 술보다 축구를 더 좋아했고, 운동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