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분 정도 걸어서 집에 오니 저녁 8시 40분쯤 되었다. 불을 켜자 깜깜한 거실이 대낮처럼 눈부시게 환해졌다. 노트북과 책이 들어 있는 묵직한 가방을 식탁의자에 놓고 안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 입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올 때 학원에 갔던 둘째가 현관 도어락 네 자리 비밀번호를 '삐삐삐삐' 누르고 들어왔다. 배가 고팠다.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를 보니 아내가 나가기 전에 끓여놓은 김치찌개의 온기가 아직 느껴졌다.

매주 화요일 저녁은 이태리 가곡을 배우는 날이다. 수업시간에 모두 일어서서 악보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한참을 부르는데 온 몸에서 기쁨이 넘쳐흘렀다. 어려운 이태리어 발음도 두렵지 않았다. 아니 틀려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자를 틀려도 개의치 않았다. 나도 모르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내 안에서는 생명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저 내 목과 몸을 열고 소리가 나오게 허락하기만 했을 뿐이다. 

5월에 경의선 책거리에서 진행하는 코칭 북페어에 참가했다. 부스를 방문하는 고객에게 야외에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코칭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알파벳 게임을 준비했다. 먼저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기 전에 참가자에게 최근에 마음이 상한 일이나 골치 아픈 일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잠시 눈을 감고 그 일을 생각하게 했다. 그 일을 생각했을 때 몸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가 어지럽거나,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눈이 침침한 느낌,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알파벳 게임은 종이 위에 A부터 Z까지 써있고 각각 알파벳 아래에 '오' '왼' '함' 이 세 글자가 무작위로 표기되어 있다. A부터 소리내어 읽으면서 아래 써진 글자가 '오'이면 오른쪽 손을 '왼'이면 왼쪽 손을, '함'이면 두 손을 동시에 드는 게임이다. 두 번째는 난이도를 높혀서 Z부터 A까지 꺼꾸로 읽어 가면서 한다. 세 번째는 A~Z까지 하는데 동작은 반대로 한다. 즉 '오'는 왼쪽 손을 '왼'은 오른쪽 손을, '함'은 점프를 한다. 마지막으로 Z~A까지 역순으로 읽으면서 동작은 거꾸로 한다. 이 게임을 하다보면 오른손 왼손이 정신을 못차리고 엉뚱한 손이 올라가기도 한다. 또 마치 컴퓨터가 랙이 걸린 것처럼 어떻게 할지 몰라 한동안을 멍하니 서있게 되기도 한다. 

이 상태에서 눈을 감고 게임 시작 전에 자신이 힘들어 하던 상황으로 다시 들어가서 느껴보도록 했다. 남편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조마조마하다는 분은 남편 목소리를 떠올려도 편안해졌다고 했다. 인간관계로 가슴이 답답했던 분은 가슴이 가벼워졌다고 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우리의 에고는 특정한 생각과 특정 감정을 연결시켜 하나의 패턴으로 만들어 놓는다. 즉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떠올리면 특정한 감정이나 몸의 반응이 자동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알파벳 게임을 하면서 에고가 이것을 더 이상 통제하지 않고 놓아버린 것이다. 패턴이 깨진 것이다. 에고의 통제가 사라진 우리에게 남은 것은 더 큰 마음과 편견없이 상황을 바라보는 자유와 여유 그리고 치유다.

"끊임없이 재잘대고 걱정하는 에고가 침묵하고 뒤로 물러날 때 비로서 우리 내면에 있던 고요함이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학원에 가기 전에 미리 저녁을 먹었다던 둘째가 출출하다며 식탁 맞은 편에 앉았다. 밥 반 공기와 숟가락 젓가락을 가져다 주었다.

오늘 이태리 가곡을 부르면서 느꼈던 샘솟는 기쁨과 두려움 없는 자유에 대해 말했다.

"아빠가 오늘 성악을 배우는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틀릴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모두 내려 놓았어. 그리고 나를 믿고 목과 몸에 힘을 빼고 활짝 열어 놓자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오고 기쁨이 샘솟고 자신감이 넘치는 놀라운 경험을 했어." 

"매일매일 우리가 하는 걱정과 불안 대신에 아빠가 성악에서 했던 것처럼 차라리 나 자신을 믿고 몸과 마음을 확 열어젖히는 것이 더 행복해지는 비결은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니?" 

김치찌개에 밥을 먹으며 유튜브를 보던 둘째가 흘끗 나를 쳐다보았다. 

"그럴 수도 있겠네."

무심하게 대답한 둘째는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다시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나성재 C2P코칭컴퍼니 대표, (사)한국코치협회 코치
나성재 C2P코칭컴퍼니 대표, (사)한국코치협회 코치

[필자 소개]

나성재 코치는 알리바바, 모토로라솔루션 등 다국적 IT기업에서 다년간 근무하였고, 한국코치협회 코치이자, C2P 코칭 컴퍼니의 대표이기도 하다. 또한 NLP 마스터로 로버트 딜츠와 스테판 길리건의 공동 저서인 영웅의 여정(Hero’s Journey) 번역서를 출간했다. 현재는 멘탈코칭 워크숍과 영웅의 여정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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